[한경ESG] 유럽 ESG 최전선
서울시내의 한 자라 매장. /연합뉴스
서울시내의 한 자라 매장. /연합뉴스
유럽이 패스트패션 퇴출을 선언했다. 지속 불가능한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과잉폐기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의지다. 소비자를 기만하는 ‘그린워싱’ 단속도 나선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패스트패션 시장을 이끄는 유럽 기업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섬유산업의 글로벌 표준을 발 빠르게 제정함으로써 권역 내 기업과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월 말 ‘지속 가능한 순환섬유를 위한 EU 전략(EU Strategy for Sustainable and Circular Textiles)’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지속 가능한 섬유산업 생태계 달성을 목표로 한다. 섬유 활용의 80%를 차지하는 의류산업이 주요 타깃이다.

EU에 따르면 섬유산업은 유럽 산업군 중 네 번째로 환경영향이 크다. 식품과 주거, 교통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과 토지 이용 측면에서는 세 번째, 원자재 및 온실가스 배출 측면에서는 다섯 번째로 환경영향이 높다.

환경영향에 대한 유럽의 책임도 크다. 유럽 기업 다수가 세계의 패스트패션 트렌드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Zara)와 에이치앤엠(H&M)은 각각 스페인과 스웨덴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아일랜드 기업 프리막(Primark)은 한층 더 저렴한 제품으로 패스트패션의 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브랜드는 유럽의 주요 상권마다 진출해 있다. 최근에는 지속 가능성 트렌드에 맞춰 매장 한편을 ‘친환경’ 섬유나 ‘탄소제로 의류’로 채워놓는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대형 종이 가방에 가득 채워 사 가는 의류 더미를 보면 기업의 지속 가능 전략은 기만에 가까워 보인다.

지속 가능 의류=패스트패션 퇴출

2000년에서 2015년 사이 의류 생산은 두 배로 늘었다. 패스트패션 트렌드가 시작된 시점이다. EU는 의류 및 신발 소비는 현재 6200만 톤으로 2030년에는 1억200만 톤으로 63%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폐기도 늘어난다. 유럽에서 매년 폐기되는 의류는 580만 톤. 1인당 매년 11.3kg을 버리는 셈이다. 판매되지 않거나 반품된 의류도 대부분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향한다. 새 의류 제조에 재활용되는 소재의 비중은 1%에 불과하다.

EU 집행위는 “1996년과 2018년 사이 EU 의류 가격은 인플레이션에 비해 30% 이상 하락했다. 반면 의류에 대한 평균 가구 지출은 증가했다”며 “섬유 수요의 증가는 화석연료로 만드는 합성섬유 생산 등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비효율적 활용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EU의 지속 가능한 순환섬유 전략의 핵심은 패스트패션의 퇴출이다. EU는 “패스트패션은 유행이 지났다(Fast fashion is out of fashion)”고 강조한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이 아니라 여러 번 입고, 재활용 가능한 의류 생태계를 만들고자 한다.

2030년까지 EU 권역 내에서 거래되는 모든 섬유 제품은 ▲내구성 ▲수선 및 재활용 가능성 보장 ▲재활용 섬유 사용 확대 ▲유해 물질 제거 ▲사회적 권리를 존중해 제조해야 한다.

먼저 의류 자체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 사용 기한을 늘리고 의류의 수선, 회수, 재사용, 재활용을 위한 순환 비즈니스모델을 지원한다. 섬유 재활용을 어렵게 하는 유해 물질 사용을 제한한다. EU는 “세계적으로 제조 과정에서 섬유의 25~40%는 폐기물이 된다. 유럽에서는 이 중 20%를 수거해 산업용 재료 등으로 재사용하지만, 합성섬유의 유해 물질이 재활용을 어렵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판매되지 않거나 반품된 의류 폐기를 금지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EU는 먼저 폐기하는 제품 수와 규모, 재사용을 위한 추가 프로세스에 관한 정보를 의무 공개해 투명성을 높인다. 이후 필요할 경우 반품된 섬유의 폐기를 금지하는 조처를 할 예정이다. 또 제품 폐기물에 대한 생산자의 책임을 확대한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의류 기업이 불필요한 과잉생산을 자제하도록 만든다. 또 디지털 혁신을 통해 소비자의 반품을 줄이고, 주문형 맞춤 제조를 확대하는 등 산업 혁신도 함께 추구할 방침이다.

합성섬유 의류에서 나오는 미세플라스틱 공해에는 포괄적으로 대처한다. 합성섬유는 의류에 사용하는 섬유의 60%를 차지하며, 초기 세탁 과정에서 다량의 미세플라스틱을 방출한다. 두세 번 착용하고 버리는 패스트패션이 미세플라스틱 공해의 가장 큰 주범인 셈이다. 이를 막기 위해 섬유 제조 과정에서 사전 세척 등 해당 산업뿐 아니라 미세플라스틱을 거를 수 있는 세탁기 필터, 세제 개발, 세탁 지침, 폐수 및 하수 처리까지 포괄적 분야에서 표준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섬유업계, 에코 라벨 기준 수립 나서

섬유산업에 일관된 표준을 제정하고,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품 간 비교를 통해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현재 섬유산업 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에코 라벨 기준을 세우고 있다. 내구성 수준과 유해 화학물질 함유, 지속 가능한 소싱 등 정보를 포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EU 집행위는 산업계에서 마련한 기준을 바탕으로 구속력 있는 제품별 요구 사항을 마련할 계획이다. 수선 가능성, 섬유의 재활용 가능성, 재활용 섬유 함량, 유해 물질 및 추적 정보 등을 바탕으로 환경영향을 평가한다. 이 평가는 공공 조달에서 필수 기준으로 도입될 예정이다. 이러한 평가 표준과 정보가 소비자에게 잘 전달되도록 섬유 라벨링과 ‘디지털 제품 여권’도 마련한다.

일관된 기준과 정보 접근성은 그린워싱을 방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EU에 따르면 최근 의류나 신발, 섬유 부문의 지속 가능성 제품 중 39%가 거짓이거나 기만적일 수 있다고 분석됐다. EU는 현재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녹색’, ‘친환경’, ‘환경에 좋은’ 등의 표현을 제한한다. 유럽의 기준에 맞게 환경 인증을 받은 제품에만 이러한 표현을 허용할 예정이다. 환경 인증 또한 기업 자체 기준이 아닌 공공기관이나 제3자 기관에 의해 이뤄지도록 한다.

의류산업은 앞서 말한 환경영향 외에도 산업 규모 및 인권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유럽 내에 섬유 및 의류 관련 기업은 16만 개가 있다. 글로벌 기업 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산업 종사자 수는 150만 명, 2019년 기준 매출액은 1620억 유로 규모다. 중요한 점은 주요 의류 기업의 제조 공장과 연결된 사회적 인권 지표다.

패스트패션 이면에는 밤낮으로 옷을 만드는 저임금 국가의 노동자들이 있다. 아동노동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의류산업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으로 저임금, 비숙련 노동 환경에 놓여 있다. EU는 패스트패션의 퇴출과 지속 가능성 개선은 곧 성평등 차원의 일이며, 제조 공장의 노동자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U 집행위는 “패러다임 전환의 주체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이 먼저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소비자의 구매 습관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인식이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순환 원칙과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고, 의류 생산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EU의 요구다. EU는 이해관계자들이 먼저 구체적 조치를 제안하고, 공동 목표를 향할 수 있도록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

베를린(독일)=이유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