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남궁선 작가
사진=남궁선 작가
서울 도심 속 빌딩을 떠올려보라. 우리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높고 크고 빈틈없는, 사각의 육중한 건물을 떠올릴 것이다. 빼곡한 빌딩숲 속, 건물들은 저마다의 울창함을 자랑하기 바쁘다.

이 건물은 다르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다. 건물 상부에 있는 구멍으로는 파란 하늘이, 허리에 있는 구멍으로는 뒤편 건물이 보인다. 울창한 숲속에서 숨 쉴 ‘틈’이 느껴진다. 주인공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자리한 ‘더 레드 빌딩’.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 4번 출구에서 서른 걸음 남짓한 거리에 있다. 이 빌딩을 설계한 OCA건축사무소의 임재용 대표건축사는 이 건물을 ‘테라피스’라고 부른다. 테라스(terrace)가 있는 오피스(office)라는 뜻이다.

오피스 안에서 ‘땅’을 밟는다

더 레드 빌딩은 지하 1층~지상 10층, 연면적 2490㎡ 규모의 오피스 빌딩이다. 2016년 초반 설계를 시작해 약 2년 반 뒤인 2018년 9월에 완공됐다. 모든 오피스 층에는 테라스가 있다.
지상 10층 루프톱의 모습.
지상 10층 루프톱의 모습.
“테라피스에서는 업무 시간에도 언제든지 문을 열고 나가면 땅을 밟고 바람을 느낄 수 있어요. 일반 사무실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죠.”

임 건축사에게 테라스는 ‘땅’이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데 초점을 맞춘 일반 오피스 빌딩과는 다르게 테라스를 따로 마련한 건 땅에 대한 그의 철학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땅과 밀접하게 지내던 존재였는데, 지금은 아파트 위에서 자고 밖에서는 차를 통해 이동해요. 그리고 유리 박스 같은 회사 건물에 갇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죠. 우리는 몸으로 땅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오피스 실내 전경. 통유리창으로 개방감을 자랑한다.
오피스 실내 전경. 통유리창으로 개방감을 자랑한다.
테라스를 찾아보기 힘든 건 요즘 오피스뿐만이 아니다. 아파트에도 통상 발코니가 달려 있지만, 거실을 넓게 쓰기 위해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확장 공사를 해 발코니를 없앤다. 그는 “고층 건물, 고층 아파트가 줄 세워진 광경이 서울 도시 풍경으로 자리잡게 됐는데 유럽과 일본만 해도 발코니 확장은 불법”이라며 “우리나라 도심에도 발코니가 있으면 사람, 빨래, 화초 등이 가지각색 어우러져 더 재밌는 풍경이 연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테라피스를 만든 그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테라스가 인기를 끌게 될 것이란 분석도 내놨다. 언제든 전염병이 확산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 데다, 보편적으로 격리 경험을 겪으면서 테라스에 대한 요구가 커질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테라스는 법적으로 용적률을 따질 때 연면적에 포함되지 않아 사업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무실에서 한강 야경 보며 공연까지

더 레드 빌딩은 ‘소통’과 ‘쉼’을 곳곳에 담고 있다. 건물 최상층에 있는 루프톱에서는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는 직원들이 간단한 모임을 하고, 때때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건물 내부에서도 6층 이상부터는 탁 트인 한강뷰를 누리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사무실 테라스에서 올려다 본 풍경.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통해 더 레드 빌딩의 모토인 ‘비움'을 느낄 수 있다.
사무실 테라스에서 올려다 본 풍경.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통해 더 레드 빌딩의 모토인 ‘비움'을 느낄 수 있다.
또 오랜 시간을 머무는 직원들을 위해 층고가 4.5~5m로 높은 공간을 마련했다. 층고가 높으면 개방감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추상적 사고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현재 이 공간은 홈쇼핑 촬영 스튜디오로 쓰인다.

임대 공간과 오피스 공간의 차별화 전략도 눈에 띈다. 설계 과정 중 가장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건물 저층부인 1~4층은 상가 임대 공간으로 마련됐다. 임대 공간은 병원, 외식업 등 다양한 업종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상층부에 있는 오피스와 한눈에 구분할 수 있도록 상가 외벽은 유리 통창을 적용했다.

더 레드 빌딩 외에도 그가 건축한 테라피스 건물들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자리한 ‘YG-1’ 건물은 지난해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을 받았다. 바람이 세게 부는 송도의 특성을 고려해 테라스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조성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클리오 사옥’은 2020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입체적인 박스가 서로를 파먹어 들어간 모양이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