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우리의 무속적 진실과 과학적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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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범신론, 거짓 과학과 결합해
기독교의 이단인 마르크시즘과
마르크시즘의 이단 나치즘 배양
문명국가는 모더니즘 위에 서야
샤머니즘적 파시즘 경계할 일
이응준 시인·소설가
기독교의 이단인 마르크시즘과
마르크시즘의 이단 나치즘 배양
문명국가는 모더니즘 위에 서야
샤머니즘적 파시즘 경계할 일
이응준 시인·소설가
2019년 9월 6일 라오스 와타이 국제공항에서 대한민국 영부인이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앞서 걸으며 라오스 국민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 장의 사진은 초현실적이다. 영부인의 옷값, 패물값처럼 국가 기밀을 참칭하며 숨길 수도 없는 저 사진은 대한민국 대통령‘직’과 외교사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다. 한데 한국인들은 영부인의 사치에는 분노하면서 그것의 ‘본질’인 저 사진에 대해서는 별 반응이 없다. 한국인들의 저울은 왜 이리 엉터리인 걸까?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독일 시인은 괴테가 아니다. 하인리히 하이네다. 독일 가곡 로렐라이의 가사가 작자 미상이던 때가 있었다. 1797년생 하이네는 생전에도 반체제 문인의 대명사였지만, 1856년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힌 뒤 훗날 히틀러 시대에는 고국의 모든 문서에서 삭제됐다. 하이네는 마르크스가 열광한 시인이었다. 망명지 파리에서 만난 둘은 절친했지만, 자유주의적 혁명가 하이네는 공산주의와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 이렇게 썼다. “(독일에서) 자연철학자의 힘이 무시무시하게 커질 거다. 자연의 원초적인 힘과 결합한 그는 고대 게르만민족의 범신론이 지닌 악마적 힘을 불러낼 것이며 고대 게르만인들의 전쟁 광기가 그 안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1834년에 출간된 책이니,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2년보다 무려 98년 전이다. 바그너적인 혼(魂), 독일적 낭만주의, 악마적 원시성, 곧 독일인의 본질이 민주공화국을 파괴하고 인류의 재앙이 되리라는 통찰이다. 하이네는 1889년생 히틀러를 몰랐다. 하지만 히틀러 같은 누군가가 독일인들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독일인들이 히틀러 같은 괴물을 호출해내 추종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유대인들은 세상 도처에서 학살당했다. 그러나 ‘과학(자연철학)에 의거해’ 그들을 살처분한 것은 독일인밖에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학문과 예술은 드높다. 그런데도 그랬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기독교의 이단인 마르크시즘과 마르크시즘의 이단인 나치즘이 탄생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원수지간인 탓에 나치즘을 우익으로 오해하지만 용어 그대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인 나치는 ‘민족공산당’이다. 1945년 패전 이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이런 성향을 다각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현대독일, 통일독일을 유지 번영시키는 힘인 것이다. 독일은 항상 스스로를 하이네의 근심과 함께 정밀한 저울에 달아본다.
새 정권 출범이 임박했다. 새 시대가 올까? 대선 당선자, 낙선자 공히 무속과 연관된 구설을 치렀다. 그들의 변명은 관심 없다. 한국인의 본질이 ‘샤머니즘’인 까닭이다. 이게 예컨대 남한에서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한국형 개신교가 됐고 북한에서는 민족공산당과 결합해 김일성교(주체사상)가 됐다. 뭐든 한반도 안으로 들어오면 무속화가 된다. 한국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무속이라는 팩트는 무의식에 편입된 채 잊힌다. 영부인의 저 사진은 외면하면서 그녀의 명품은 욕하는 대중처럼.
무속은 ‘홀림’과 ‘기복(祈福)’이다. 홀림에는 과학성이 없고 기복에는 공공성이 없다. 비판과 감시 대상이어야 할 정치인을 숭배하며 충만을 느끼고 증오를 정의로 착각하며 좀비 떼가 된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의 이론마냥, 우리 폭력적 사회의 무속적 진실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제물로 바쳐진다. 그 희생양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문명국가는 모더니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 사회가 포스트모던한(엉터리인) 이유는 온갖 가면(지식인, 혁명가, 선한 사마리아인 등)을 쓴 무당들과 샤머니즘이 아무 데나 달라붙는 ‘잡탕성’ 때문이고 그게 대한민국 불행의 요점이다.
속이지 않으려면 속지 말아야 한다. 하이네의 통찰로 항상 우리 자신을 분석하고 교정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것은 굿판이 아닌가, 누군가 나타나면 저자는 무당이 아닌가 그 본색을 의심해야 한다. 무속적 기질을 가진 대중이 파도가 되는 공화국은 어둡다. 이 샤머니즘적 파시즘의 과학적 거짓을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새로운 시대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독일 시인은 괴테가 아니다. 하인리히 하이네다. 독일 가곡 로렐라이의 가사가 작자 미상이던 때가 있었다. 1797년생 하이네는 생전에도 반체제 문인의 대명사였지만, 1856년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힌 뒤 훗날 히틀러 시대에는 고국의 모든 문서에서 삭제됐다. 하이네는 마르크스가 열광한 시인이었다. 망명지 파리에서 만난 둘은 절친했지만, 자유주의적 혁명가 하이네는 공산주의와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에 이렇게 썼다. “(독일에서) 자연철학자의 힘이 무시무시하게 커질 거다. 자연의 원초적인 힘과 결합한 그는 고대 게르만민족의 범신론이 지닌 악마적 힘을 불러낼 것이며 고대 게르만인들의 전쟁 광기가 그 안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1834년에 출간된 책이니,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2년보다 무려 98년 전이다. 바그너적인 혼(魂), 독일적 낭만주의, 악마적 원시성, 곧 독일인의 본질이 민주공화국을 파괴하고 인류의 재앙이 되리라는 통찰이다. 하이네는 1889년생 히틀러를 몰랐다. 하지만 히틀러 같은 누군가가 독일인들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독일인들이 히틀러 같은 괴물을 호출해내 추종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유대인들은 세상 도처에서 학살당했다. 그러나 ‘과학(자연철학)에 의거해’ 그들을 살처분한 것은 독일인밖에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학문과 예술은 드높다. 그런데도 그랬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기독교의 이단인 마르크시즘과 마르크시즘의 이단인 나치즘이 탄생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원수지간인 탓에 나치즘을 우익으로 오해하지만 용어 그대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인 나치는 ‘민족공산당’이다. 1945년 패전 이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이런 성향을 다각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현대독일, 통일독일을 유지 번영시키는 힘인 것이다. 독일은 항상 스스로를 하이네의 근심과 함께 정밀한 저울에 달아본다.
새 정권 출범이 임박했다. 새 시대가 올까? 대선 당선자, 낙선자 공히 무속과 연관된 구설을 치렀다. 그들의 변명은 관심 없다. 한국인의 본질이 ‘샤머니즘’인 까닭이다. 이게 예컨대 남한에서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한국형 개신교가 됐고 북한에서는 민족공산당과 결합해 김일성교(주체사상)가 됐다. 뭐든 한반도 안으로 들어오면 무속화가 된다. 한국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무속이라는 팩트는 무의식에 편입된 채 잊힌다. 영부인의 저 사진은 외면하면서 그녀의 명품은 욕하는 대중처럼.
무속은 ‘홀림’과 ‘기복(祈福)’이다. 홀림에는 과학성이 없고 기복에는 공공성이 없다. 비판과 감시 대상이어야 할 정치인을 숭배하며 충만을 느끼고 증오를 정의로 착각하며 좀비 떼가 된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의 이론마냥, 우리 폭력적 사회의 무속적 진실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제물로 바쳐진다. 그 희생양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문명국가는 모더니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 사회가 포스트모던한(엉터리인) 이유는 온갖 가면(지식인, 혁명가, 선한 사마리아인 등)을 쓴 무당들과 샤머니즘이 아무 데나 달라붙는 ‘잡탕성’ 때문이고 그게 대한민국 불행의 요점이다.
속이지 않으려면 속지 말아야 한다. 하이네의 통찰로 항상 우리 자신을 분석하고 교정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것은 굿판이 아닌가, 누군가 나타나면 저자는 무당이 아닌가 그 본색을 의심해야 한다. 무속적 기질을 가진 대중이 파도가 되는 공화국은 어둡다. 이 샤머니즘적 파시즘의 과학적 거짓을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새로운 시대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