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화 약세 근본 원인은 '경제활력 저하'
원·달러 환율이 1270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 환율 급등은 표면적으론 미국 중앙은행의 긴축정책 때문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서학개미’ 증가 등이 구조적으로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논리를 따르면 미국의 긴축이 일단락되더라도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정상을 찾기는 어렵다.

시간여행을 통해 자본시장 개방 전후 상황을 보자. 우리나라는 1992년 1월 3일 자본시장을 외국에 개방했다. 개방 첫날 외국 자본의 ‘사자 주문’으로 국내 상장된 766개 종목 중 512개가 상한가로 장을 마쳤다. 1992년 자본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인 투자 등록제’를 도입했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이 한국을 선진국지수에 편입하지 않는 이유로 이 제도를 꼽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진입장벽이라는 주장이다. 당시에는 경쟁적으로 한국에 달러를 공급하려고 했다. 그만큼 한국 경제의 전망을 밝게 봤다는 얘기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달러 부족은 ‘한국의 경제 활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반증이다. 달러 유입 부진의 근저 요인은 ‘경제 활력’ 저하인 셈이다.

최근 일각에서는 원화 환율 급등 현상을 ‘원화 약세가 아니라 달러 강세’로 해석하기도 한다. 환율은 통화 교환 비율이기 때문에 ‘원화 약세와 달러 강세’는 동전의 앞뒷면 관계다. 그럼에도 구분하려는 것은, 한국이 피해자이고 미국이 가해자라는 정책사고가 깔려서다. 양자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원화 가치가 국내 요인으로 떨어지면 중립적 달러의 상대 가치가 올라갈 수 있다. 즉 달러 강세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원화 약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근래 5년 사이 현상을 해석하면서도 ‘남 탓’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원·달러 환율 상승의 ‘배후’ 중 하나로 국민연금이 꼽힌다. 국민연금의 전체 투자액 중 해외 주식·채권 비중은 2017년 말 21.2%에서 지난해 말 33.8%로 늘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위해 필요한 달러를 모두 현물시장에서 사들이면서 원화 약세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10.77% 잠정 수익률을 기록했다. 1999년 11월 기금운용본부가 설립되고 2019년에 거둔 11.31% 수익률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실적이다. 지난해 코스피지수가 3.63% 오르는 데 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약 3배 높은 수익률이다. 그만큼 연금 고갈 시점이 뒤로 미뤄졌다. 그리고 해외 투자 자산들은 속속 원화로 환전될 것이므로 국민연금이 달러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은 한쪽 측면만 보는 것이다.

서학개미 급증도 환율 상승을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들의 해외 주식 투자 확대가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학개미들의 해외 투자 증가세도 언젠가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다. 그때는 국내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이 늘어날 것이다.

자본시장에서 달러가 부족한 실제적인 이유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 상당 정도 철수했기 때문이다.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 비중은 2021년 말 기준 27.6%로 2009년 세계 금융위기 때 이후 최저 수준이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외국인의 국내 상장주식 보유 비중은 23.2%에 불과하다. 그리고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를 대거 매도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6만 전자’로 추락했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할 때일수록 그런 취약성을 가져오는 ‘근저 요인’이 무엇인가를 깊이 천착해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섣불리 ‘희생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지난 5년간 우리는 향락주의(YOLO)에 함몰돼 구조개혁을 방기했다. 혁신 의지도 실종됐다. 환율 안정을 위해서는 결국 한국 경제의 매력도와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생산성 제고는 경제주체의 ‘경제 하려는 의지’와 ‘제도의 정합성’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