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연출가 김명곤이 오는 4~8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영하는 창극 '춘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극작·연출가 김명곤이 오는 4~8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영하는 창극 '춘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국립창극단의 창극 공연에는 한글 자막과 영어 자막이 함께 나온다. 보통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나오지 않고 창(唱)을 하는 대목에서 노랫말이 자막으로 뜬다. 대사보다 알아듣기 힘든 노래의 의미를 관객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주요 배역들이 오페라의 아리아와 비슷한 눈대목을 부를 때 한글이 아니라 영어 자막을 쳐다보는 관객들이 많다. 창극의 원전인 판소리 사설(대본)에 나오는 한자어나 고어(古語), 사투리가 노랫말에 그대로 쓰여서 한글 자막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서다. 판소리에 바탕을 둔 창극뿐 아니라 최근 공연한 ‘리어’ 같은 창작 창극도 마찬가지다. 소리꾼들이 익숙한 한자어와 사투리를 습관적으로 노랫말에 많이 쓰는 탓이다.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초연된 김명곤 대본·연출의 창극 ‘춘향’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가’‘이별가’‘옥중가’ ‘어사출도’ 등 주요 눈대목이나 여럿이 같이 부르는 합창이나 노랫말이 귀에 쏙쏙 박혀 굳이 자막을 볼 필요가 없었다.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자막 없이 소리와 극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전통 소리의 아름다움을 동시대 감각으로 풀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대본을 쓴 김명곤이 한자어와 고어가 많은 판소리 원전을 쉬운 현대어로 옮기면서도 소리의 맛을 제대로 살려낸 덕분이다.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한 국립창극단 '춘향'.  /국립극장 제공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한 국립창극단 '춘향'.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은 이 작품을 오는 4~8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재공연한다. 공연장을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옮기고, 공연시간(140분)도 20분 늘렸다. 창극 ‘춘향’ 확장판에도 김명곤이 대본을 썼고, 연출을 맡았다. 최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이번 공연에서도 관객에게 노래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가사 말 하나 토씨 하나 세밀하게 수정해 가며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판소리나 창극이나 노랫말의 중요성을 간과해 왔습니다. 기존에 있는 거 갖다 붙이면 노랫말이 되는 줄 알아요. 옛날엔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들이었겠지만 요즘 못 알아들으면 소용없죠. 바로크 오페라에 들어 있는 라틴어를 요즘 사람들이 못 알아듣듯이 판소리나 창극에도 요즘 쓰지 않는 한자어나 고어가 많이 들어가면 해석도 안 되고 소리꾼도 뜻을 모르고 부르니 감정 전달이 안 돼요. 노래 자체가 죽어버려요.”

극작·연출가이자 배우인 김명곤은 ‘소리꾼’으로도 유명하다. 10년간 명창 박초월(1917~1983)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소리꾼 ‘유봉’ 역을 열연했다. 그는 판소리의 맛을 해치지 않고 노랫말을 어떻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칠 수 있을지 수십 년 간 고민해 왔다고 했다. “스승님(박초월)께 ‘춘향가’ 중 ‘사랑가’를 배울 때였어요. ‘도련님은 훌륭 대장~’ 하시는 데 의미를 알 수 없어 여쭤보니 그냥 ‘훌륭한 대장으로 알아둬’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흉중 대략’, 즉 ‘가슴 속 품은 커다란 뜻’이란 의미였죠. 그런 식으로 변형되고 왜곡돼 판소리 판본 중엔 지금도 해석이 안 되는 말이 많아요.”

그는 ‘춘향’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1998년 국립창극단의 6시간짜리 완판 장막 창극 ‘춘향전’의 대본을 썼고, 2000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시나리오도 썼다. “완판장막창극은 현전하는 여러 판본을 집대성하는 의미가 있었고, 영화는 명창 조상현의 소리(보성제)를 뮤직비디오처럼 재현하는 거였어요. 제가 새롭게 해석하거나 수정할 여지가 많지 않았죠.”

그는 2019년 국립창극단으로부터 작품 제안을 받았을 때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춘향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춘향전은 청춘남녀의 사랑과 열정, 헤어짐, 슬픔 등이 노랫말로 잘 표현돼야 합니다. 어렵거나 못 알아듣는 말 때문에 그런 감정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곤란하죠. 특히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가’는 젊은 세대들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 하는 말이 없도록 쉬운 말로 싹 바꿨습니다.”
창국 '춘향'을 연출하는 김명곤이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김병언 기자
창국 '춘향'을 연출하는 김명곤이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김병언 기자
자타가 공인하는 ‘춘향 전문가’에게도 노랫말을 현대화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대본 초안을 만드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다. 한자어와 고어의 원뜻을 최대한 살리면서 시적인 리듬과 장단에도 맞는 현대어를 찾는 데 고심을 거듭했다. 재공연을 위한 ‘수정 대본’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추가되는 첫 장면에 남원의 명승지를 소개하는 방자의 노래가 있는데 원문에는 ‘유랑’이니 ‘환우성’이니 어려운 한자어투성이죠. 노랫말 전체를 한자어 하나 없이 다 바꿨습니다.”

그가 언급한 대목의 판소리 판본(김연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문 밖 나가면, 금수청풍으로 백구는 유랑이요. 녹림간의 꾀꼬리 환우성 지어 울어 춘몽을 깨우는 듯’. 공연 대본에는 ‘동문 밖 나가오면 맑은 하늘 갈매기 훨훨 날고, 푸른 숲에 꾀꼬리 짝을 찾아 서로 울며 사랑을 나누는 듯’으로 바뀌었다. “혼자서 노래를 불러 가면서 잣귀에 맞는 우리말로 바꾸면 작창 선생님(유수정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조금씩 수정합니다. 배우가 노래하다가 더 편한 노랫말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게 좋으면 반영하기도 합니다.”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한 국립창극단 '춘향'.  /국립극장 제공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한 국립창극단 '춘향'. /국립극장 제공
춘향과 몽룡의 캐릭터를 시대 정서에 맞게 수정하느라 대사를 바꾸고 새롭게 추가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지금의 10~20대들이 ‘요즘 저런 사람이 어딨어’가 아니라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라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열혈 청춘 남녀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 창극 ‘춘향’은 그렇게 탄생했다. 재공연에선 몽룡의 순수하고 정열적인 캐릭터가 좀 더 부각된다. 봄에 들뜬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과 춘향에게 이별을 통보하러 가는 심리를 표현한 눈대목이 추가됐다.

“초연에선 신분을 초월해 순수한 남자의 마음에 감동하는 춘향의 모습에 비해 가문의 압박을 이겨내며 사랑을 이뤄내는 몽룡의 간절함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이번에 캐릭터 보완이 잘 됐습니다. 제가 꿈꾸고 생각했던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에 한층 가까워졌다고 할까요. 공연장이 커지면서 음악도 무대도 더 풍성해졌고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