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결권 제한·지분매각 기로
양정숙 “법으로 소유규제 풀자”
인수위는 시행령 개정 추진 시사
이날 공정위가 발표한 대기업 명단에는 태영이 새로 올라왔다. 태영은 시공능력평가 14위 중견 건설업체인 태영건설과 지상파 방송사인 SBS를 거느리고 있는 기업집단이다. 태영의 자산규모가 지난해 9조8000억원(44위)에서 올해 11조2020억원(41위)으로 늘면서 대기업의 기준이 되는 ‘10조원 클럽’에 가입한 것이다.
태영그룹 입장에선 마냥 반갑기만 한 소식은 아니다. 대기업이 되면서 보유하고 있던 SBS 지분 중 상당 부분을 2년 안에 팔아야 하는 입장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자산 10조 대기업, 지상파 10%까지만 소유
현행 방송법 8조3항은 자산총액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기업집단 소속 회사에 대해선 지상파 방송사 지분을 10% 넘게 소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 소유규제가 적용되는 기업의 범위를 정하는 일은 시행령에 위임한 것이다.방송법 시행령 4조1항은 ‘공정거래법에 의거해 공정위가 매년 공시하는 기업집단 중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기업집단에 속하는 기업’을 규제 대상으로 규정했다. 즉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을 지목한 것이다.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이 지상파 지분을 10% 넘게 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해당 기업은 방송법에 따라 10%를 초과하는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는 6개월 이내 위반 사항을 해소하라는 시정명령을 받게 된다. 10%를 제외한 나머지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SBS는 현재 태영그룹 지주회사인 TY홀딩스가 36.9%로 최대주주다. 방통위는 태영이 대기업으로 지정된 직후인 지난 2일 TY홀딩스에 의결권 제한 사실을 통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법상 소유 규제에 의해 방송사 지분 매각 위기에 처한 기업은 태영 뿐만이 아니다. SM(삼라마이더스)그룹은 지난해 대기업으로 지정되면서 방통위로부터 보유하고 있던 UBC울산방송 지분(30%)을 매각하라는 시정명령을 받았다. 호반그룹 역시 지난해 대기업으로 지정되며 방송법 위반 논란이 일자 KBC광주방송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양정숙 "GDP 비례로 법에 규정하자"
양정숙 무소속 의원이 지난해 12월20일 대표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은 이런 맥락 속에서 나왔다. 양 의원안은 지상파 방송사 소유제한 기준이 되는 기업집단의 자산총액을 현행처럼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로 상향해 명기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구체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의 1000분의 5(0.5%) 이상 1000분의 15(1.5%) 이하 범위로 자산총액 기준을 정하도록 했다. 지난해 GDP가 2057조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1.5%인 30조원까지 자산총액 기준이 완화될 수 있는 셈이다. 양 의원은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소유제한 규정이 마련된 2008년엔 GDP가 1154조원에 불과했고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기업 수는 17개였다”며 “2020년 GDP가 1924조원,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기업은 40개로 늘어난 점을 보면 현행 소유규제는 시장축소형 규제로 작용하고 있어 개정의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양 의원은 “자산총액 기준을 특정금액으로 할 경우 국내경제 규모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할 수 있어 GDP에 연동되는 비율을 특정해 국내경제 규모에 따라 규제수준의 적절성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양 의원 발의안은 다분히 SBS 등 기업이 지분을 가진 방송사들의 요구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입법과정에 정통한 인사는 “SBS가 규제를 풀어달라고 정치권에 민원을 제기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양 의원안에는 김병욱 고용진 위성곤 안호영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9명이 발의자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들이 SBS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한 것이다.
하지만 양 의원안에 대한 국회 논의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지난 3월 30일 전체회의에 방송법 개정안을 상정해 법안소위로 넘겼다. 법안소위에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수위도 정부 차원 규제완화 시사
국회 입법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선수를 쳤다. 인수위 과학기술교육분과 간사인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6일 브리핑에서 대기업의 지상파 방송사 소유규제를 향후 과제로 꼽았다.이달 3일 인수위가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도 글로벌 미디어 강국 실현을 위한 방송사업 허가·승인·등록제도, 소유·겸영 및 광고·편성 규제 등 미디어산업 전반에 대한 낡은 규제 개선이 포함됐다. 인수위는 새 정부 출범 직후 정부 주도로 꾸려질 ‘미디어혁신위원회’에서 미디어산업 개편 방향을 논의하겠다는 방침이다. 박 의원은 지난달 28일 브리핑에서 “인수위가 종료되면 정부 차원의 거버넌스(혁신위)로 넘겨 논의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를 견제하는 ‘거대 야당’이 될 민주당에선 대기업 소유규제 완화를 새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회 언론·미디어 제도개선 특위 위원장인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당장 문제가 된 SBS의 사례를 갖고 보편화하면 대기업의 지상파방송 진입이 무분별하게 허용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 다른 관계자도 “정부가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 다양한 이해관계자 의견을 반영하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며 “국회 차원의 언론·미디어 특위 등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계에서 규제 완화를 ‘재벌에 대한 방송 헌납’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도 새 정부에는 부담이다. 전국언론노조는 지난 3일 “인수위가 태영의 민원창구를 자처하고 있다”며 “무분별한 규제완화가 이어진다면 재벌 방송이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미디어로 여론을 교란하는 일이 얼마든지 현실화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국회 안팎에서는 양정숙 안과 같이 소유규제 완화를 시행령에서 법률로 상향해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과방위 한 관계자는 “소유규제가 시대착오적이라 일부 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인수위 말대로 정부가 시행령 개정을 통해 추진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양정숙 안처럼 법률로 해당 규정을 상향입법해 정부가 바뀌더라도 기업과 방송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