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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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급일에 재직하는 근로자에게만 지급한다’는 조건이 달린 정기 상여금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상여금에 ‘재직 조건’이 붙은 경우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에 반하는 해석이다. 최근 하급심에서 이와 같은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어 기존 판례가 바뀔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흔들리는 통상임금 판결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전지원)는 지난 4일 금융감독원 전·현직 직원 1832명이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근로자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미 제공한 근로의 대가로 임금이 발생한 것인데도, 재직 조건을 이유로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임금 전액지급 원칙’을 정한 근로기준법에 반하는 근로계약으로서 무효”라고 판시했다.

금감원은 직원들에게 홀수월 1일마다 기본급의 100%에 해당하는 정기상여금을 지급해왔다. 근로자들은 2017년 “정기상여금은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므로 통상임금”이라며 “상여금을 포함해 통상임금을 다시 계산하고 추가분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측은 “임금 규정에 ‘상여금 지급 시점에 재직 중인 자에 한해 지급한다’는 ‘재직 조건’을 두고 있으면 ‘고정성’이 성립되지 않는 만큼 이 경우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맞서왔다.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인용될 경우 산업계에선 소송과 인건비 증가 등의 후폭풍이 예상된다. 정기상여금 산입으로 통상임금이 커지면 시간외수당, 연차휴가보상금 등 각종 수당도 증가하게 된다. 법무법인 광장의 강세영 변호사는 “상당수 기업이 재직 조건을 활용해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고 있다”며 “이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유사 소송이 줄을 잇는 등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원고인 근로자 측이 승리한 금융감독원 추가 임금 청구 소송 2심의 핵심 쟁점은 ‘재직 조건’을 두고 있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였다. 이에 대해 2013년 대법원은 ‘재직 조건’이 있는 상여금은 근로제공 외에도 ‘재직’이라는 추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통상임금을 규정하는 ‘고정성’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필수 요건으로 비중있게 본 것이다. 고정성은 추가 조건을 달지 않고 일정 근무에 대한 대가를 확정적으로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 판단이 그동안 기준점이 됐지만, 이번 서울고등법원은 이와 정 반대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의 판결은 2018년 세아베스틸 통상임금 소송 등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앞선 판결들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법조계와 노동계에선 향후 대법원 법리가 최종적으로 뒤집힐 경우 기업들이 대거 줄소송에 휘말리는 등 통상임금 갈등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급심에서 뒤집히는 통상임금 판결

금감원 임금 청구 소송에서 1심 법원은 기존 대법원 판결을 따랐다. 당시 재판부는 “사용자와 근로자는 합의를 통해 임금의 액수, 지급조건, 지급형태 등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정기상여금에 재직 조건을 두는 것은 강행법규 등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재직 조건이 부가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재직 조건 자체가 무효”라는 근로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정기상여금은 고정급에 가깝고 기본적인 생계유지의 근간이 되는 기본급에 준하는 임금”이라며 “여기에 재직 조건을 뒀다고 이미 제공한 근로에 상응하는 임금 부분까지 지급하지 않는 것은 그 유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소송에서 원고를 대리한 법무법인 중심의 류재율 변호사는 “재직 조건을 축소 해석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무효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며 “통상임금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데 고정성보다는 소정 근로의 대가인지를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제2 통상임금 갈등 사태”우려도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단과 다른 판결이 나온 건 처음이 아니다. 서울고법은 2018년 12월 선고된 ‘세아베스틸 통상임금 사건’ 2심에서 처음으로 대법원의 ‘재직 조건’ 해석에 반기를 들고 “재직자 조건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듬해 ‘기술보증기금 통상임금 사건’에서도 2심 법원이 같은 해석을 내놓으면서 법조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금감원 통상임금 판결도 이런 기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평가다.

대법원은 2020년에 세아베스틸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법리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다루기로 결정한 만큼 판례를 변경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계가 법원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정기 상여금에 ‘재직 조건’을 부착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는 것을 ‘기술적으로’ 막고 있다. 대법원 판단이 뒤집힐 경우, 상여금 비중이 큰 국내 대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추가 임금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과거 3년 치 임금에 소급적용해 추가금을 지급하라”고 줄소송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한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는 “2013년 통상임금 판결 당시에도 여러 기업이 큰 손실을 봤다”며 “대법원이 기존 판결을 뒤집을 경우 기업들은 예측하지 못한 임금 부담과 소송에 시달리며 제2의 통상임금 사태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법원에서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부담이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이란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가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기업이 이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은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을 판단할 때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다”며 “기업의 입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산업계에 불리한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최진석/곽용희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