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5일(현지시간) 수도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에서 열린 강연에서 “가계의 금융자산을 저축에서 투자로 옮겨 자산소득을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은 2023조엔(약 1경9706조원)으로 처음 2000조엔을 넘었다. 일본인들은 금융자산의 54%인 1092조엔을 예금과 현금으로 갖고 있다. 주식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개인투자자들에게 주는 세제 혜택을 늘려 현금과 예금에 묶여 있는 가계의 금융자산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한다는 게 기시다 총리의 구상이다.

자산소득은 일해서 버는 급여와 달리 예금이자와 주식의 배당, 부동산 임대료 등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8년 일본의 가구당 자산소득은 15.8엔(약 154원)에 불과했다. 일본의 예금이자가 사실상 ‘제로(0)’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일본인의 투자 성향을 보다 공격적으로 바꾸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2003년 금융청이 ‘저축에서 투자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래 일본 정부가 20년째 반복하는 구호다. 자산소득을 2배 늘리겠다는 기시다 총리의 선언이 의미 없는 구호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날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작년 9월 말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현실화했다는 데 진짜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총재 선거에서 ‘레이와(현재 일본 연호) 버전 소득 2배 증가’ 목표를 내세워 승리하고, 10월 4일 제100대 일본 총리에 취임했다.

‘레이와 버전’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의 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공약의 원조는 따로 있다. 기시다 총리가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그가 속한 계파인 고치회(현 기시다파)의 창립자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가 처음 ‘소득 2배 증가’ 목표를 내세웠다.

1960년 이케다 당시 총리는 13조엔이었던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을 10년 만에 26조엔으로 2배 늘리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일본 경제가 매년 7.2% 성장하면 10년 만에 소득을 2배 늘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예상과 달리 일본 경제가 2배로 커지는 데는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56~1973년 고도 경제성장기 일본 경제가 연평균 9.1% 성장한 덕분이었다.

이케다 총리의 재임 기간과 달리 오늘날 일본은 1989년 버블(거품) 경제 붕괴 이후 30년 장기 침체에 신음하고 있다. 1989~2020년 일본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9%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30년간의 경제성장률이 이어진다고 가정할 때 2020년 말 539조엔이었던 일본 GDP가 2배로 늘어나려면 77년이 걸린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의 목표대로 경제성장률이 3%로 뛰어오른다고 가정하더라도 목표 달성에는 22년이 소요된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비현실적인 목표라는 비관론이 우세했던 이유다.

그래서인지 기시다 총리는 취임 직후인 10월 말 치러진 총선 유세 기간에는 ‘소득 2배 증가’ 목표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기시다 내각이 간판 경제 정책인 ‘새로운 자본주의’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내용은 번번이 빠져 있다.

기시다 총리가 런던 강연을 통해 자민당 총재 선거 이후 반년여 만에 내놓은 새 목표가 4만113달러(약 5080만원)인 소득 대신 15.8엔인 자산소득을 2배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30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경제 현실과 타협한 결과물로 해석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