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기록 화가들의 평행 이론, 바스키아[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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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7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길 꿈꿨다."
"자기 홍보는 마치 심심풀이 땅콩 같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으니까."
한 사람이 얘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어 하고, 관심받길 원하는 인물로 보이네요.
그런데 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각각 다른 사람의 얘기입니다. 스타가 되길 꿈꾼 인물은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 출신의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입니다. 두 번째 얘기는 '팝 아트'의 선구자인 미국 화가 앤디 워홀(1928~1987)이 한 말입니다.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두 화가가 비슷한 말을 했다니 놀라운데요. 바스키아는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낙서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속세엔 관심이 별로 없고 어두운 음지에서만 활동했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죠. 반면 워홀은 탁월한 사업 감각을 갖추고 대중적인 작품들을 남긴 화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화가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어록에서 알 수 있듯 둘 다 스타 의식으로 가득했고, 목표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명성은 오늘날 경매 시장에서도 톡톡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화가의 작품 모두 최고가 기록을 연이어 달성했죠. 바스키아가 그린 '무제'(1982)는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00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경매에 나온 미국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난해 워홀에 의해 깨졌는데요. 워홀의 ‘총 맞은 마릴린 먼로’(1964)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9500만 달러(약 2500억 원)에 낙찰된 겁니다.
평행 이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훗날 최고가 기록을 세울 화가들끼리 서로 알아본 걸까요. 두 사람은 3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만나자마자 친해졌습니다. 바스키아가 유명해진 것도 워홀의 힘이 큽니다.
이번 글에선 두 사람 가운데 바스키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낙서 하나로 미술계를 평정했던 개성 넘치는 스타 바스키아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바스키아의 인생은 불꽃 같았습니다. 뜨겁게 타올랐지만, 28살 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인지 바스키아의 삶과 작품들이 더욱 빛나고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바스키아는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었습니다. 비록 부모님 모두 이방인이었지만, 바스키아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어 아들을 데리고 뉴욕 주요 미술관을 누볐습니다.
덕분에 바스키아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영화 ‘바스키아’(1996)에도 바스키아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하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가 7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을 하며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10살엔 자퇴를 하고 집을 나왔죠. 그리고 길거리를 전전했습니다.
뉴욕의 길은 점차 바스키아의 그림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흔해 빠진 개똥(Same Old Shit)’ 이란 뜻의 그룹 ‘세이모(SAMO)’를 결성하고, 거리와 벽에 낙서를 하는 그라피티 화가가 된 겁니다. 1980년엔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즈 스퀘어 쇼’, 1981년엔 ‘뉴욕-뉴 웨이브’에 잇달아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의 가장 큰 특성은 '자유로움'입니다.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기호와 채색 등을 결합해 독특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후 그 위에 덧그리는 기법을 자주 활용했죠. 오일 스틱(유성 크레파스), 스프레이 마커 등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즉흥적이고 반항적인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죽음'도 그의 그림들을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이 또한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바스키아가 8살에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을 지루해 하는 아들에게 건네줬습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 무서웠을 법한데요. 그는 오히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해부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인체의 전체적인 모습, 뼈, 각종 내장 기관들에 호기심을 갖고 따라 그렸죠. 그리고 이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넣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표현했습니다.
22살이 되던 해엔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이미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던 워홀과 만나게 된 거죠. 워홀은 바스키아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그에게 단숨에 매료됐습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공동작업까지 제안했죠.
그렇게 두 사람은 2년간 150여 점에 걸쳐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때론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며, 각자의 작품 세계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스키아는 어느새 워홀에 못지않은 유명 스타가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둘 사이를 질투했던 걸까요. 바스키아가 워홀의 동성 연인이라는 등 온갖 악성 루머가 퍼졌습니다. 스승에 폐를 끼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바스키아는 결국 점점 워홀과 멀어졌습니다. 바스키아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워홀과 연결됩니다. 두 사람이 결별한 후, 1987년 워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결국 약물 중독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바스키아가 작가로 본격 활동한 건 고작 8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3000여 점에 달합니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전설이다"라고 했던 바스키아의 말 그대로 '전설'이 된거죠.
다시 이번에 있었던 경매 얘기를 떠올려 볼까요. 워홀의 작품이 미국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것을 보고, 두 화가는 하늘나라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왠지 함께 호탕하게 웃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로의 재능을 발견하고 응원해 주던 두 사람의 마음은 숫자나 기록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테니까요. 그것이 미술사에 길이 남은 전설들의 빛나는 우정일 겁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자기 홍보는 마치 심심풀이 땅콩 같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으니까."
한 사람이 얘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어 하고, 관심받길 원하는 인물로 보이네요.
그런데 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각각 다른 사람의 얘기입니다. 스타가 되길 꿈꾼 인물은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 출신의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입니다. 두 번째 얘기는 '팝 아트'의 선구자인 미국 화가 앤디 워홀(1928~1987)이 한 말입니다.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두 화가가 비슷한 말을 했다니 놀라운데요. 바스키아는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낙서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속세엔 관심이 별로 없고 어두운 음지에서만 활동했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죠. 반면 워홀은 탁월한 사업 감각을 갖추고 대중적인 작품들을 남긴 화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화가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어록에서 알 수 있듯 둘 다 스타 의식으로 가득했고, 목표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명성은 오늘날 경매 시장에서도 톡톡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화가의 작품 모두 최고가 기록을 연이어 달성했죠. 바스키아가 그린 '무제'(1982)는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00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경매에 나온 미국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난해 워홀에 의해 깨졌는데요. 워홀의 ‘총 맞은 마릴린 먼로’(1964)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9500만 달러(약 2500억 원)에 낙찰된 겁니다.
평행 이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훗날 최고가 기록을 세울 화가들끼리 서로 알아본 걸까요. 두 사람은 3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만나자마자 친해졌습니다. 바스키아가 유명해진 것도 워홀의 힘이 큽니다.
이번 글에선 두 사람 가운데 바스키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낙서 하나로 미술계를 평정했던 개성 넘치는 스타 바스키아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바스키아의 인생은 불꽃 같았습니다. 뜨겁게 타올랐지만, 28살 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인지 바스키아의 삶과 작품들이 더욱 빛나고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바스키아는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었습니다. 비록 부모님 모두 이방인이었지만, 바스키아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어 아들을 데리고 뉴욕 주요 미술관을 누볐습니다.
덕분에 바스키아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영화 ‘바스키아’(1996)에도 바스키아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하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가 7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을 하며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10살엔 자퇴를 하고 집을 나왔죠. 그리고 길거리를 전전했습니다.
뉴욕의 길은 점차 바스키아의 그림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흔해 빠진 개똥(Same Old Shit)’ 이란 뜻의 그룹 ‘세이모(SAMO)’를 결성하고, 거리와 벽에 낙서를 하는 그라피티 화가가 된 겁니다. 1980년엔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즈 스퀘어 쇼’, 1981년엔 ‘뉴욕-뉴 웨이브’에 잇달아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의 가장 큰 특성은 '자유로움'입니다.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기호와 채색 등을 결합해 독특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후 그 위에 덧그리는 기법을 자주 활용했죠. 오일 스틱(유성 크레파스), 스프레이 마커 등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즉흥적이고 반항적인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죽음'도 그의 그림들을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이 또한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바스키아가 8살에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을 지루해 하는 아들에게 건네줬습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 무서웠을 법한데요. 그는 오히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해부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인체의 전체적인 모습, 뼈, 각종 내장 기관들에 호기심을 갖고 따라 그렸죠. 그리고 이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에 넣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표현했습니다.
22살이 되던 해엔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이미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던 워홀과 만나게 된 거죠. 워홀은 바스키아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그에게 단숨에 매료됐습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공동작업까지 제안했죠.
그렇게 두 사람은 2년간 150여 점에 걸쳐 협업을 진행했습니다. 때론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며, 각자의 작품 세계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스키아는 어느새 워홀에 못지않은 유명 스타가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둘 사이를 질투했던 걸까요. 바스키아가 워홀의 동성 연인이라는 등 온갖 악성 루머가 퍼졌습니다. 스승에 폐를 끼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바스키아는 결국 점점 워홀과 멀어졌습니다. 바스키아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워홀과 연결됩니다. 두 사람이 결별한 후, 1987년 워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결국 약물 중독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바스키아가 작가로 본격 활동한 건 고작 8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3000여 점에 달합니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전설이다"라고 했던 바스키아의 말 그대로 '전설'이 된거죠.
다시 이번에 있었던 경매 얘기를 떠올려 볼까요. 워홀의 작품이 미국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것을 보고, 두 화가는 하늘나라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왠지 함께 호탕하게 웃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로의 재능을 발견하고 응원해 주던 두 사람의 마음은 숫자나 기록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테니까요. 그것이 미술사에 길이 남은 전설들의 빛나는 우정일 겁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