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기억하고, 기리고…42주년 5·18 추모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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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사흘 앞두고 추모……열사 가족들 42년째 참배
"오빠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열사의 여동생은 누군가의 물음에 "5·18이 한창 1980년, 병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요"라고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5·18 민주화 운동 42주년을 사흘 앞둔 15일, 국립 5·18묘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추모탑을 향한 길을 힘겹게 올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열사들의 묘소가 한줄 한줄 모습을 드러낸다.
"한기, 두기, 세기…' 열 손가락으로 열사들의 묘역의 숫자를 헤아리던 어린아이는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이곳 1묘역에 자리 잡은 열사들의 묘역만 778기. 2묘역의 143기까지 더하면 921기의 열사들의 묘소가 5·18민주묘지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림잡았던 숫자보다 많은 열사의 묘소 앞에서 추모탑에 올려진 바위보다 무거운 역사의 무게를 체감한 추모객들은 절로 열사의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고, 눈물을 흘렸다.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을 앞둔 주말 민주묘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오는 18일 기념식을 준비하는 공사로 분주했다.
참배 행렬도 이어져 정치인, 시민단체, 노조, 여러 기관 관계자들의 추모 행렬이 묘지를 도착할 때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묘지에서 울려 퍼졌다.
42년째 반복되온 추모 행렬 사이에 올해 눈에 띄는 것은 가족 단위 등 일반인 참배객들이었다.
김해에서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한 가족이 먼 길을 달려왔고, 어린 딸 아이의 손을 잡고 수도권에서 찾아온 아버지도 있었다.
대전의 한 역사 연구모임 회원들은 열사의 묘역 하나하나 앞에 서서 책을 펴고 열사의 사연을 하나하나 되짚고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공식 기념일의 혼잡함을 피해 미리 가족의 묘역을 참배 온 열사의 가족과 후손들도 있었다. 1980년 결혼을 앞둔 청년이었던 정민구 열사는 5월 22일 시민군에 결합해 순찰하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어깨를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정 열사의 가족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그를 찾아 광주의 모든 병원을 뒤졌고,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다시 가족 품에 안겼다.
정 열사의 여동생은 이날 자녀와 손자의 손을 잡고 동생의 묘소를 찾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묘소에 술을 잔뜩 붓는 손자에게 "술을 좋아했단다.
많이 드려라"라고 말했다.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동생은 그 후로 42년째 해마다 5월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민주묘지에 묻힌 오빠를 만나러 온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되새기며 5·18 민주묘지를 찾은 추모객들은 방명록에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적었다.
/연합뉴스
열사의 여동생은 누군가의 물음에 "5·18이 한창 1980년, 병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요"라고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5·18 민주화 운동 42주년을 사흘 앞둔 15일, 국립 5·18묘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추모탑을 향한 길을 힘겹게 올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열사들의 묘소가 한줄 한줄 모습을 드러낸다.
"한기, 두기, 세기…' 열 손가락으로 열사들의 묘역의 숫자를 헤아리던 어린아이는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이곳 1묘역에 자리 잡은 열사들의 묘역만 778기. 2묘역의 143기까지 더하면 921기의 열사들의 묘소가 5·18민주묘지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림잡았던 숫자보다 많은 열사의 묘소 앞에서 추모탑에 올려진 바위보다 무거운 역사의 무게를 체감한 추모객들은 절로 열사의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고, 눈물을 흘렸다.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을 앞둔 주말 민주묘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오는 18일 기념식을 준비하는 공사로 분주했다.
참배 행렬도 이어져 정치인, 시민단체, 노조, 여러 기관 관계자들의 추모 행렬이 묘지를 도착할 때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묘지에서 울려 퍼졌다.
42년째 반복되온 추모 행렬 사이에 올해 눈에 띄는 것은 가족 단위 등 일반인 참배객들이었다.
김해에서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한 가족이 먼 길을 달려왔고, 어린 딸 아이의 손을 잡고 수도권에서 찾아온 아버지도 있었다.
대전의 한 역사 연구모임 회원들은 열사의 묘역 하나하나 앞에 서서 책을 펴고 열사의 사연을 하나하나 되짚고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공식 기념일의 혼잡함을 피해 미리 가족의 묘역을 참배 온 열사의 가족과 후손들도 있었다. 1980년 결혼을 앞둔 청년이었던 정민구 열사는 5월 22일 시민군에 결합해 순찰하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어깨를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정 열사의 가족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그를 찾아 광주의 모든 병원을 뒤졌고,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다시 가족 품에 안겼다.
정 열사의 여동생은 이날 자녀와 손자의 손을 잡고 동생의 묘소를 찾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묘소에 술을 잔뜩 붓는 손자에게 "술을 좋아했단다.
많이 드려라"라고 말했다.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동생은 그 후로 42년째 해마다 5월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민주묘지에 묻힌 오빠를 만나러 온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되새기며 5·18 민주묘지를 찾은 추모객들은 방명록에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적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