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잘못이 전부는 아니지만…" 5·18 경찰유가족의 용서(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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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로 경찰 4명 압사시킨 가해자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그저 죄송"
유가족 "죽은 듯 살았다…사고 만들어지게끔 한 책임자들 사과해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참여했다가 죽임을 당한 경찰들의 유가족과 가해자가 42년 만에 만나 사죄하고 용서하는 자리를 가졌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 앞에서 마련한 자리에는 가해 당사자 배모(77) 씨와 당시 사망한 경찰 4명의 유가족이 참석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 30분께 배씨(당시 고속버스 운전기사)는 시위대의 도청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진압대형을 갖추고 선 경찰들을 향해 고속버스를 몰고 돌진,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했다.
조사위는 지난해 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당시 시위진압 작전에 참여한 계엄군과 시위진압에 투입된 경찰의 피해를 파악하면서 이 사건을 조사했다.
이날 입장문을 읽은 유족 대표 정원영(54) 씨의 차분하면서도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가 경찰충혼탑 앞을 맴돌았다.
정씨는 "정말 너무 힘든 자리"라며 "우리 아버님들의 죽음에 한편 책임자이지만 전부일 수는 없는 역사적 모호함을 우리가 안게 됐다.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현장에서 숨진 고(故) 정충길 경사의 아들인 정씨는 반평생을 미망인으로 산 82세 노모를 모시고 어려운 걸음을 했다.
정씨는 "당신(배씨)이 모든 책임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다"며 "지금에 와서야 당신의 미안함이 우리에게, 어머님들께, 나아가 아버님들께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당신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플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과뿐만 아니라 화해의 자리가 돼야 한다는 생각도 이성에서는 일어나지만, 감성에서는 쉽지 않았다.
어머님들은 안 만나겠다고도 하셨다"며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주셔야만 한다"고 토로했다.
고 이세홍 경사 모친 강귀례(82)씨는 "어떻게 용서가…말로 용서한다고 용서가 되겠나"라며 "우리가 살아온 생각을 하면 어떻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나"라고 물었다.
유족 9명과 함께 자리한 가해 당사자 배씨는 충혼탑에 분향·헌화하고 근처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에서 묵념하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어두운 옷차림을 한 그는 충혼탑 앞에 가만히 서서 몸을 조금씩 떨었다.
한 고령의 유족은 희생자 묘비를 어루만지고 일어서는 그의 등을 치며 "용서를 빈다고 용서가 빌어지나"고 답이 없을 질문을 던지고는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배씨는 참배를 마친 뒤 "제가 지금 와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저도 나름대로 그 상황과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 현장을 꿈에라도 한 번 꿔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것은 도저히 (꿈에) 나오지 않더라"며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다.
막막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조사위에 따르면 정 경사와 강정웅 경장, 이세홍 경장, 박기웅 경장 등 희생자 4명은 함평경찰서 소속이었다.
시위가 확산하면서 전남도경 뿐 아니라 지역 일선 경찰서에도 동원 명령이 내려져 희생자들을 포함한 55명이 전남도청 일대에 배치됐다가 이들 4인은 돌아오지 못했다.
배씨는 현장에서 체포돼 재판받으면서 "야간이었고 최루가스가 버스 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됐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으며 2년여 복역한 뒤 풀려났고 이후 특별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의 삶은 신산했다.
유족들은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고도 매월 3만∼4만원 정도 남짓한 연금 이외에 아무런 보상이 없었으며 일반 시민 위주인 5·18 관련 단체들로부터 외면받았다고 주장했다.
유족 대표 정씨는 "정부도, 5월 당사자 단체들도 죽은 듯 있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은 삶을 살았다"며 "말도 안 되는 연금을 주면서 유공자라고 해줬던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5월 단체들은 우리가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결코 다르지 않은 죽음임을 받아들이고, 누가 5월의 책임자인지를 함께 물을 수 있어야 한다"며 이런 일의 가교 구실을 배씨가 해줘야만 미안함이 진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씨 모친 박덕님씨는 "우리(남편)는 사람을 살리려고 갔는데 어째 사람을 죽인 사람, 죄인이 됐다"며 "어느 누구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숨어서 살았다"고 지난 42년을 돌아봤다.
유족들은 배씨를 넘어 진정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역시 따져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씨는 "그 사고가 만들어지게끔 한 책임자들이 먼저 사과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위는 배씨를 포함해 이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조사해 당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볼 예정이다.
조사위는 "이 조사가 끝난 후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국가에 권고하게 된다"며 "그에 따라 국가의 합당한 대우와 절차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유가족 "죽은 듯 살았다…사고 만들어지게끔 한 책임자들 사과해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참여했다가 죽임을 당한 경찰들의 유가족과 가해자가 42년 만에 만나 사죄하고 용서하는 자리를 가졌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 앞에서 마련한 자리에는 가해 당사자 배모(77) 씨와 당시 사망한 경찰 4명의 유가족이 참석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 30분께 배씨(당시 고속버스 운전기사)는 시위대의 도청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진압대형을 갖추고 선 경찰들을 향해 고속버스를 몰고 돌진,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했다.
조사위는 지난해 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당시 시위진압 작전에 참여한 계엄군과 시위진압에 투입된 경찰의 피해를 파악하면서 이 사건을 조사했다.
이날 입장문을 읽은 유족 대표 정원영(54) 씨의 차분하면서도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가 경찰충혼탑 앞을 맴돌았다.
정씨는 "정말 너무 힘든 자리"라며 "우리 아버님들의 죽음에 한편 책임자이지만 전부일 수는 없는 역사적 모호함을 우리가 안게 됐다.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현장에서 숨진 고(故) 정충길 경사의 아들인 정씨는 반평생을 미망인으로 산 82세 노모를 모시고 어려운 걸음을 했다.
정씨는 "당신(배씨)이 모든 책임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다"며 "지금에 와서야 당신의 미안함이 우리에게, 어머님들께, 나아가 아버님들께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당신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플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과뿐만 아니라 화해의 자리가 돼야 한다는 생각도 이성에서는 일어나지만, 감성에서는 쉽지 않았다.
어머님들은 안 만나겠다고도 하셨다"며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주셔야만 한다"고 토로했다.
고 이세홍 경사 모친 강귀례(82)씨는 "어떻게 용서가…말로 용서한다고 용서가 되겠나"라며 "우리가 살아온 생각을 하면 어떻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나"라고 물었다.
유족 9명과 함께 자리한 가해 당사자 배씨는 충혼탑에 분향·헌화하고 근처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에서 묵념하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어두운 옷차림을 한 그는 충혼탑 앞에 가만히 서서 몸을 조금씩 떨었다.
한 고령의 유족은 희생자 묘비를 어루만지고 일어서는 그의 등을 치며 "용서를 빈다고 용서가 빌어지나"고 답이 없을 질문을 던지고는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배씨는 참배를 마친 뒤 "제가 지금 와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저도 나름대로 그 상황과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 현장을 꿈에라도 한 번 꿔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것은 도저히 (꿈에) 나오지 않더라"며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다.
막막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조사위에 따르면 정 경사와 강정웅 경장, 이세홍 경장, 박기웅 경장 등 희생자 4명은 함평경찰서 소속이었다.
시위가 확산하면서 전남도경 뿐 아니라 지역 일선 경찰서에도 동원 명령이 내려져 희생자들을 포함한 55명이 전남도청 일대에 배치됐다가 이들 4인은 돌아오지 못했다.
배씨는 현장에서 체포돼 재판받으면서 "야간이었고 최루가스가 버스 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형이 확정됐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으며 2년여 복역한 뒤 풀려났고 이후 특별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의 삶은 신산했다.
유족들은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고도 매월 3만∼4만원 정도 남짓한 연금 이외에 아무런 보상이 없었으며 일반 시민 위주인 5·18 관련 단체들로부터 외면받았다고 주장했다.
유족 대표 정씨는 "정부도, 5월 당사자 단체들도 죽은 듯 있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은 삶을 살았다"며 "말도 안 되는 연금을 주면서 유공자라고 해줬던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5월 단체들은 우리가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결코 다르지 않은 죽음임을 받아들이고, 누가 5월의 책임자인지를 함께 물을 수 있어야 한다"며 이런 일의 가교 구실을 배씨가 해줘야만 미안함이 진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씨 모친 박덕님씨는 "우리(남편)는 사람을 살리려고 갔는데 어째 사람을 죽인 사람, 죄인이 됐다"며 "어느 누구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숨어서 살았다"고 지난 42년을 돌아봤다.
유족들은 배씨를 넘어 진정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역시 따져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씨는 "그 사고가 만들어지게끔 한 책임자들이 먼저 사과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위는 배씨를 포함해 이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조사해 당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볼 예정이다.
조사위는 "이 조사가 끝난 후 어떤 조처를 할 것인지 국가에 권고하게 된다"며 "그에 따라 국가의 합당한 대우와 절차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