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날갯짓 같은 피아노…플레트네프의 베토벤 [류태형의 명반 순례]
청중을 홀리는 연주였다.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객석의 놀라운 표정을 훑어보며 피아니스트는 유유히 퇴장했다. 언젠가 피아니스트로 내한해 독주회를 열었던 미하일 플레트네프 얘기다. 게리 올드만 같은 표정으로 미소를 띠며 들려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의 기묘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러시안내셔널오케스트라(RNO)와 함께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 5곡을 담은 음반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1957년 옛 소련 아르한겔스크 출신인 플레트네프는 음악가 부모 밑에서 어릴 때부터 지휘와 악기를 배웠다. 1978년 차이콥스키국제콩쿠르에서 21세의 나이로 우승함으로써 음악계에 알려졌다. 1990년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독립적인 민간 오케스트라인 RNO를 결성했다.

이 전집에서 플레트네프는 지휘자가 아니라 솔로이스트로 온전히 피아노에만 집중하고 있다. 우선 녹음이 돋보인다. 2006년 9월 2일과 3일 독일 본 베토벤잘에서 녹음됐다. 피아노의 음색이 아름답고 유연하면서도 풍성하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밸런스가 탄탄하게 잡혀 있다. 목관악기군의 연주도 정밀하게 피아노와 대비를 이룬다.

풍부한 음색 속에서 플레트네프는 단 한순간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허를 찌르는 루바토와 겉과 속을 바꾼 듯한 혁명적인 표현, 적재적소의 프레이징에서 즉흥적인 요소가 살아 숨쉰다. 플레트네프의 피아노는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마술같이 교묘하게 서사를 펼쳐나간다. 잘 따라오니 익숙해지나 싶다가도 갑자기 템포를 바꿔 롤러코스터를 태운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베토벤 음악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피아노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플레트네프의 손끝 아래 딱딱하고 무뚝뚝한 베토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안 간쉬가 지휘하는 RNO는 플레트네프의 피아니시모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피아노의 훌륭한 파트너이자 라이벌로 기능하고 있다. 플레트네프가 RNO를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집의 충격적인 연주와 마찬가지로 진짜 베토벤의 시대에는 이렇게 연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고개를 든다.

플레트네프는 모든 곡에서 통상적인 카덴차를 사용했다. 첫 번째 CD의 협주곡 1번만이 예외로 베토벤의 두 번째 카덴차를 채택했다. 우리가 늘 들었던 카덴차보다 약간 짧고 간결하다. 플레트네프는 “베토벤은 살아있다. 그 프레이징에서 모든 절규와 기쁨의 순간에 우리의 삶을 통과시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공감하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진 연주를 담은 음반이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