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이 되지 말자", 고야[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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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를 누비는 멋진 영웅은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죠.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입니다. 누군가는 피범벅이 돼 쓰러져 있고,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며 팔로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사람은 두 팔을 위로 한껏 올렸네요. 검게 그을린 피부나 옷차림을 보면 그저 평범한 노동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팔을 펼쳐든 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들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유독 빛이 환하게 비쳐 빛나고 있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을 자처하는 순교자처럼 느껴지죠.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 이 안에 영웅은 없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려냈습니다.
1808년 5월 3일. 이처럼 특정 연도와 날짜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고야의 그림으로 이 날짜는 스페인 국민, 그리고 세계 곳곳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커다란 상흔을 잊지 않고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내려 한 고야의 노력 덕분이겠죠. 이 작품은 후대 화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도 전시돼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한국 전쟁의 아픔을 고야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그려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집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을 비롯해 전쟁 등에 담긴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다수 그렸습니다. 그런데 고야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들을 그렸던 건 아닙니다. 고야는 궁정 화가로 일했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그가 왜, 어떻게 변화하게 된 건지 궁금한데요. 고야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금 도금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도금, 조각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13살부터 미술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34살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43살엔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가 돼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상류층의 화려한 일상을 담아내는 일을 했던 거죠.
잘 나가던 궁정 화가였던 그의 삶은 46살부터 완전히 바뀌게 됐습니다. 이때 고야는 콜레라에 걸렸고, 고열에 시달리다 청력을 잃게 됐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화가로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됐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얼굴을 그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안에 담긴 참혹한 현실까지도 바라보게 됐죠. "기존엔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로스 카프리초스'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 그림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잠들어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부엉이가 날아오르고, 그 뒤로는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갯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책상 앞엔 부제 그대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이성을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나태함과 악습, 야만성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이후엔 '마하' 연작을 선보였는데요. 먼저 54살에 그린 '옷 벗은 마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고야는 종교재판소까지 가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신화 속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현실 속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외설 논란이 불거졌고 고야는 신성 모독을 했다는 비판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종교재판에선 여인에게 옷을 입히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고야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려야 했습니다. 1808년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하자, 고야는 프랑스군의 만행을 알리는 두 점의 유화를 그렸습니다. 그중 하나가 '1808년 5월 3일'이며, 또 다른 그림은 바로 전날의 모습을 담은 '1808년 5월 2일'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들을 전쟁이 일어나고 6년 뒤에 완성했는데요. 한참 후에 그린 것이지만, 두 그림을 보면 당시 이틀에 걸쳐 스페인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1808년 5월 3일'이 프랑스 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형당한 민중들을 그리고 있다면, '1808년 5월 2일'은 그 직전에 일어난 마드리드 민중 봉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이 침략하자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반면 민중들은 집에 있던 작은 칼과 몽둥이 등을 갖고 나와 싸웠죠. 하지만 고야는 이 순간을 무조건 미화하진 않았습니다. 흰 터번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은 프랑스 용병으로 와 있던 이집트 군인들인데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집트 군인들도, 이들을 죽이려는 민중들도 모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를 통해 인간을 극단적인 광기로 몰아넣은 전쟁의 비극 자체를 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73세에 그는 마드리드 외곽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 틀어박혀 '자식을 삼키는 사트로누스' '마귀의 잔치' 등 더욱 어두운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주로 검은색을 사용했기 때문에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기도 하죠. 어느 날 하인이 고야에게 늘 어둡고 잔인한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만인이 되지 말자는 얘기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전쟁만큼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전쟁은 매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한편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있죠. 고야가 그토록 열심히 붓을 들어 전쟁의 순간을 그린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고야의 그림들을 다시 떠올리며, "야만인이 되지 말자"던 그의 말을 깊이 되새겨 봅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입니다. 누군가는 피범벅이 돼 쓰러져 있고,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며 팔로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사람은 두 팔을 위로 한껏 올렸네요. 검게 그을린 피부나 옷차림을 보면 그저 평범한 노동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팔을 펼쳐든 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들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유독 빛이 환하게 비쳐 빛나고 있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을 자처하는 순교자처럼 느껴지죠.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 이 안에 영웅은 없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자유를 외치던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려냈습니다.
1808년 5월 3일. 이처럼 특정 연도와 날짜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고야의 그림으로 이 날짜는 스페인 국민, 그리고 세계 곳곳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커다란 상흔을 잊지 않고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내려 한 고야의 노력 덕분이겠죠. 이 작품은 후대 화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도 전시돼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한국 전쟁의 아픔을 고야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그려냈다는 점이 놀라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집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을 비롯해 전쟁 등에 담긴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다수 그렸습니다. 그런데 고야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들을 그렸던 건 아닙니다. 고야는 궁정 화가로 일했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그가 왜, 어떻게 변화하게 된 건지 궁금한데요. 고야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금 도금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도금, 조각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13살부터 미술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34살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43살엔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가 돼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상류층의 화려한 일상을 담아내는 일을 했던 거죠.
잘 나가던 궁정 화가였던 그의 삶은 46살부터 완전히 바뀌게 됐습니다. 이때 고야는 콜레라에 걸렸고, 고열에 시달리다 청력을 잃게 됐습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화가로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됐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얼굴을 그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안에 담긴 참혹한 현실까지도 바라보게 됐죠. "기존엔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로스 카프리초스'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 그림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잠들어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부엉이가 날아오르고, 그 뒤로는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갯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책상 앞엔 부제 그대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이성을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나태함과 악습, 야만성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이후엔 '마하' 연작을 선보였는데요. 먼저 54살에 그린 '옷 벗은 마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고야는 종교재판소까지 가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신화 속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현실 속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외설 논란이 불거졌고 고야는 신성 모독을 했다는 비판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종교재판에선 여인에게 옷을 입히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고야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려야 했습니다. 1808년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하자, 고야는 프랑스군의 만행을 알리는 두 점의 유화를 그렸습니다. 그중 하나가 '1808년 5월 3일'이며, 또 다른 그림은 바로 전날의 모습을 담은 '1808년 5월 2일'입니다. 고야는 이 작품들을 전쟁이 일어나고 6년 뒤에 완성했는데요. 한참 후에 그린 것이지만, 두 그림을 보면 당시 이틀에 걸쳐 스페인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1808년 5월 3일'이 프랑스 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형당한 민중들을 그리고 있다면, '1808년 5월 2일'은 그 직전에 일어난 마드리드 민중 봉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이 침략하자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반면 민중들은 집에 있던 작은 칼과 몽둥이 등을 갖고 나와 싸웠죠. 하지만 고야는 이 순간을 무조건 미화하진 않았습니다. 흰 터번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은 프랑스 용병으로 와 있던 이집트 군인들인데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집트 군인들도, 이들을 죽이려는 민중들도 모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를 통해 인간을 극단적인 광기로 몰아넣은 전쟁의 비극 자체를 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73세에 그는 마드리드 외곽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 틀어박혀 '자식을 삼키는 사트로누스' '마귀의 잔치' 등 더욱 어두운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주로 검은색을 사용했기 때문에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기도 하죠. 어느 날 하인이 고야에게 늘 어둡고 잔인한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고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만인이 되지 말자는 얘기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전쟁만큼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전쟁은 매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한편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있죠. 고야가 그토록 열심히 붓을 들어 전쟁의 순간을 그린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고야의 그림들을 다시 떠올리며, "야만인이 되지 말자"던 그의 말을 깊이 되새겨 봅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