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 아시아 순방지로 일본이 아닌 한국을 다녀간 데다 그 첫 일정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 방문이었다. "한국 반도체 위상이 높아졌다", "한미 기술 동맹·경제 안보의 기틀이 마련됐다" 같은 기꺼워하는 반응이 잇따랐다.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3나노미터(㎚·1나노는 10억 분의 1m) 웨이퍼에 사인하는 모습까지 연출되자 국내외 미디어들은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장밋빛 미래를 전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 뒤에선 일본 역시 움직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해 2나노 협력 강화를 꾀하는 등 조용히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바이든-기시다, 미일정상회담서 반도체 협력 강화 논의

28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23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미일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 협력 강화를 논의했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최첨단 반도체 개발 등 경제안보 분야와 우주 개발 등에 관한 구체적 협력에 바이든 대통령과 의견이 일치했다"고 언급했다.

앞서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이달 중순께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2나노 이하 반도체 공동연구를 위한 실무협의단(워킹그룹) 설치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달 초 미국을 방문한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은 지나 러몬드 미 상무장관과의 회담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 개발 협력에 대한 큰 틀에서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양측은 당시 만남에서 최첨단 반도체 제품 실용화와 제품 양산을 포함한 포괄적 협력을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특히 현재 최첨단보다 2세대 앞서있는 2나노 이후의 기술, 미국 인텔이 보유한 '칩 렛' 기술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첨단 기술을, 일본은 반도체 소재 기술을 담당하면서 공생 관계를 구축하자는 아이디어를 나눈 것으로 점쳐진다.

미국 IBM은 지난해 2나노 반도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애플과 인텔도 2나노 기술 개발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또 IBM은 일본 이바라키현 소재 산업기술종합연구소에서 도쿄 일렉트론, 캐논 등의 반도체 장비 제조사들과 함께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일 양국은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AI) 실용화에 필요한 차세대 반도체 연구 개발을 위한 협력에도 나서기로 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바이든 대통령 눈앞에서 세계 최초로 3나노를 선보이며 생산 기술력을 뽐냈지만 미일이 설계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차세대 반도체 연구에서 힘을 합친다면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일본 반도체 추락했지만 '소부장' 여전히 건재

업계에서는 미국 정부가 일본과 차세대 반도체 연구를 위해 손을 잡은 이유를 두고 일본 반도체 소부장의 경쟁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 자체의 경쟁력은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반도체 제조장치, 실리콘 웨이퍼나 회로 형성에 사용하는 레지스트(감광제), 반도체 표면 연마제 등 소부장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 기술력을 보유했다.

소부장의 중요성은 미중 글로벌 경제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양상. 이에 삼성전자와 대만 TSMC, 인텔 등이 초미세공정 분야에서 경쟁 중인 가운데 관련 연구개발(R&D) 투자도 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전 공정 장비 분야에 대한 투자액은 전년 대비 14% 증가해 역대 최고치인 1030억 달러(한화 약 130조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한 엔지니어는 "소부장에서의 '일본 파워'는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한국 반도체 매출이 역대 최고를 찍었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 다 한국 반도체만의 성과는 아니다"라면서 "미국이나 일본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어마어마하다. 미일 반도체 동맹은 소부장 중심 협력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저력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5.20/뉴스1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5.20/뉴스1
일본의 반도체 장비 기업 경쟁력은 입증됐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기준 글로벌 15대 반도체 장비 업체 중 7개가 일본 기업이다. 1·2위는 각각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네덜란드의 ASML로, 국내 기업 중에선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세메스(13위)만 포함됐다.

조용히 반도체 키우는 기시다 총리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0월 취임하면서 내세운 경제 정책인 '새로운 자본주의'의 구체적 실행 계획에 반도체 육성 방안을 담았다. 최근 총리관저에 다리오 길 미국 IBM 수석부사장 등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차세대 반도체 분야의 미일 연계 강화에 대한 의견을 경청한 뒤 "(양자컴퓨터의) 계산 능력을 사회 인프라로 개방하는 방안, 칸막이 행정 규제 개선 등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반도체 산업을 두고 '조락(잎이 시들어 떨어졌다는 뜻) 산업'이라 자책할 정도로 경쟁력을 상실한 대표 분야로 꼽힌다. 한때 세계 10대 반도체 회사 중 일본 기업이 6곳일 정도로 막강했지만 지난해 기준 10위권 내에 기옥시아 정도만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이에 기시다 총리는 민간 자본, 정부 보조금 등을 투입해 대규모 공장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례로 기옥시아는 이와테현 기타가미시에 총 사업비 1조엔(한화 약 10조원)을 투자해 내년 상반기(1~6월) 중 새 공장을 완공할 계획이다. 낸드플래시 글로벌 점유율에서 기옥시아(13.2%)는 삼성전자(34.5%)에 크게 뒤지지만 공동 투자하는 미국 웨스턴디지털(19.2%)을 합치면 삼성전자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다. 아사히신문은 "기옥시아가 미국과 협력해 생산능력을 키워 삼성전자에 맞설 계획"이라고 전한 바 있다. 기옥시아는 일본 정부가 조성한 6000억엔 규모의 기금을 투자받는 것도 확실시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TSMC와의 협업을 통해 삼성전자를 압박하는 전략도 구사 중이다. TSMC는 지난해 소니, 덴소 등과 손잡고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 건립에 착수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4000억엔의 보조금을 받았다. 도시바는 1000억엔(약 1조원)을 투자해 이시가와현에 '전력 반도체' 제조공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전력 반도체는 전기자동차의 전력 소비량 감소 등에 쓰이는 최첨단 반도체다. 미쓰비시전기는 반도체 웨이퍼 생산력을 2025년까지 현재의 2배로 끌어올리기 위해 제조 라인 확충에 착수했다.

한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는 "바이든 대통령의 삼성전자 방문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며 "소부장 업체를 대우하는 일본의 풍토가 부러운 측면도 있다. 기시다의 반격은 소부장과 외교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