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네딕도수녀회가 운영하는 요양센터인 파티마홈에서 만난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오경묵 기자
성베네딕도수녀회가 운영하는 요양센터인 파티마홈에서 만난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오경묵 기자
“2년간 한센인을 돌보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60년이 흘렀네요.”

1961년 오스트리아에서 홀로 한국에 들어온 엠마 프라이싱거는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였다. 이후 61년이 흘렀다. 8남매의 둘째인 엠마는 가족과 약혼자가 있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역만리 타국의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지난 20일 세계인의날을 맞아 한국 정부가 주는 대통령상을 받았다.

구순의 할머니는 안경 너머 소녀 같은 얼굴로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60성상을 한센병과 벌인 사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한센인의 상황이 너무 딱해 두고 갈 수가 없었다”며 “한센병을 퇴치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뿐”이라고 담담히 소감을 말했다.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에만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강제 수용됐던 환자들은 해방과 전쟁통에 수용소를 탈출했지만 극심한 후유증 때문에 부모 형제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전국 산기슭이나 다리 밑 움막에서 살았다. 이집 저집 동냥하며 연명하다 돌팔매를 맞기 일쑤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이던 한국은 그들을 돌볼 여유도 사람도 없었다. 구호의 손길을 뻗친 곳은 종교단체와 엠마 같은 외국인 간호사들뿐이었다.

“너무 가난해 약은커녕 매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었지만 한센병 치료와 퇴치는 그때 시작하면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오스트리아부인회, 독일 구라협회, 한국 천주교회 등 많은 분과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그에게 한센병은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면 완치할 수 있는 전염병에 불과했다. 그가 대구에 온 건 당시 서정길 대주교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와 있던 오스트리아 출신 루디 신부에게 구라(救癩·나환자 구제)사업을 맡겼고 엠마와 연락이 닿은 루디 신부가 빨리 와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61년 29세의 나이에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해 대구에 도착한 엠마 프라이싱거.
1961년 29세의 나이에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해 대구에 도착한 엠마 프라이싱거.
엠마는 경북 고령과 의성 등에 있던 한센인 정착촌에 며칠씩 기거했다. 장갑도 끼지 않고 약을 발라주고 무릎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치료했다. 위험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간호사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며 “발이나 다리를 직접 절단한 환자도 1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몸 전체가 썩어들어가는데 두고 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최윤수 전 대구가톨릭대 약대 교수는 “당시엔 한센인을 받아주거나 수술하겠다는 병원도 없어 엠마의 위험천만한 행동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1962년 그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병원을 건립하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초 민간병원인 가톨릭피부과의원이다. “나를 많이 도와준 서순봉 경북대 의대 교수님(작고)은 환자를 찾아다니기보다 외래진료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바로 오스트리아로 날아가 오스트리아부인회에 병원 건립비 지원을 요청했다. 연필로 쓴 계획서만 갖고 무작정 시작한 당돌한 제안이었다.

오스트리아도 2차대전 후 사정이 넉넉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부인회는 점심값을 아껴 모은 50만달러를 내놨다. 1980년대 후반까지 엠마를 통해 지원한 90만달러는 현재 가치로 100억원(한국은행 추산)이 넘는 큰돈이다. 병원 건립 후에는 전국에서 환자들이 찾아왔다. 일반 환자 중에서도 한센병으로 진단된 환자가 많았다. 1970년 한 해에만 4만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그 덕분에 새로 한센병 진단을 받은 국내 환자는 1970년 1292명에서 1980년 195명, 2006년 10명으로 줄었다.

엠마는 “지금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들이었지만 기적처럼 다 이뤄졌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그저 하늘의 수족이었을 뿐입니다.”

1996년까지 병원장과 간호사를 겸하던 엠마는 병원을 천주교 대구대교구에 이관했다. 대신 1970년대부터 맡아온 한국인 한센인 구호단체 릴리회와 나사업가연합회 회장을 맡아 정착촌을 찾아다니며 한센인의 눈썹 이식, 의수족 보급 등의 의료재활과 한센인의 자립 돕기, 자녀 장학사업 등을 펼쳤다. 그에게 처음 우리말을 가르친 이효상 전 국회의장은 한센인 정착촌을 찾아다니던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다. “칼바람 부는 낙동강 모래밭에서 추위에 떨며 목청 높여 뱃사공을 부르던 그를 보며 엠마를 위해서라도 우리 형제들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이 전 의장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생전에 “그러나 주여, 그보다도 엠마의 마음을 배우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을 남겨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 약력

△1932년 오스트리아 엡스티롤 출생
△1957년 잘츠부르크주립간호대 졸업
△1961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구라사업 돕기 위해 내한
△1962~1966년 오스트리아부인회 부속 가톨릭피부과의원 건립, 병원장 겸 간호사로 활동
△1977년 릴리회 회장(현 명예회장)
△1979년 5·16민족상
△2007년 호암상 사회봉사상
△2011년 오스트리아 정부 금십자상
△2022년 세계인의날 대통령상

한국 한센인 지원 앞장선 오스트리아부인회
점심값 아껴가며 기부금 모아 90만弗 후원…현재 가치 100억

한국의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않은 오스트리아 부인회 대표단들이 한국을 찾아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릴리회 제공
한국의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않은 오스트리아 부인회 대표단들이 한국을 찾아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릴리회 제공
한국 한센병 환자들을 도운 오스트리아 간호사들의 이야기는 뒤늦게 알려진 게 많다. 주변에 알리지 않고 워낙 조용히 헌신했기 때문이다. 1961년 한국에 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한센인 병원을 세우고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함께 한센인 재활 및 자립사업을 펼쳤다면, 비슷한 시기 소록도에는 마르가리타(87)와 마리안나(88) 간호사가 있었다. 1959년과 1962년 한국에 온 두 수녀는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헌신적으로 한센인을 돌봤다. 2005년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할 수 없고 부담이 되기 싫다”며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 고국에 돌아간 뒤 건강이 나빠진 상황에서 최저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다. 2018년 타계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이 소식을 듣고 두 수녀의 생활비를 지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엠마는 오스트리아부인회의 지원으로 대구에 병원을 짓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기숙사 건립과 장학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소록도 두 천사로 알려진 마르가리타와 마리안나 간호사는 부인회 지원으로 소록도에 결핵병원과 영아원 등을 건립했다. 세 명의 간호사는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준 생활비도 자신들이 쓰지 않고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썼다.

한센병 환자 구호단체인 릴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옥분 경북대 명예교수는 “1947년 결성된 오스트리아부인회는 엠마를 도와 많은 지원금을 한국에 보냈다”며 “1958년 해외 구호사업지로 한국을 택했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부인회는 회원이 15만 명에 달한다. 이 회장은 “2차대전 후 연합군의 신탁통치 끝에 1955년 주권을 회복한 오스트리아도 당시 형편이 넉넉지 않은 때였다”며 “한국이 지원받은 100억원에 가까운 돈은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들이 점심 한 끼를 굶거나 수프로 때우며 모은 참으로 값지고 귀한 돈”이라고 설명했다.

"내 형제, 우리가 돕자"…한은 부산지점이 만든 릴리회
한국 공동모금회의 효시…"작지만 꾸준히 돕는 게 기본정신"

오스트리아부인회와 릴리회의 지원으로 운영돼온 가톨릭피부과의원의 현재 모습.
오스트리아부인회와 릴리회의 지원으로 운영돼온 가톨릭피부과의원의 현재 모습.
오스트리아 등 해외 지원과 외국 간호사들이 시작한 한센인 구호 활동은 한국인의 삶도 바꿔놨다. ‘내 형제를 우리 손으로 돕자’며 1970년 부산에서 태동한 릴리회도 이 중 하나다.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에 실린 한센인 구호 광고를 본 김광자 한국은행 부산지점 행원은 부산시 외곽에 있는 한센병환자마을에 양말과 과자를 들고 찾아갔다. 예상보다 많은 900여 명의 환자가 있었고 김씨는 선물이 부족해 보따리를 풀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행원 20여 명과 함께 한센병 환자를 돕는 릴리회를 조직한 게 이 무렵이다.

한국은행 전국 지부와 독지가들까지 가세하면서 릴리회 조직은 전국 규모로 커졌다. 김씨가 당시 돈 6000원을 첫 회비로 모아 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에 보내자 한 신부가 “이 돈을 가장 요긴하게 쓸 사람은 엠마”라고 소개한 것이 릴리회와 엠마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모금한 돈은 모두 엠마에게 전달됐고, 그는 한국인의 헌신에 감동해 1977년부터 2008년까지 릴리회 회장을 맡았다. 릴리회(회장 이옥분 경북대 명예교수)는 1970년부터 지금까지 약 80억원을 모금해 한센인 치료와 재활, 자녀 장학사업 등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본회 사무실을 대구에 둔 릴리회는 많은 산하단체를 탄생시켰고 조직은 해외까지 확대됐다.

릴리회 이사인 박석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릴리회는 우리나라 공동모금회의 효시”라며 “오스트리아부인회처럼 밥 한 끼, 차 한 잔 값을 아껴 작지만 꾸준히 이웃을 돕자는 봉사정신이 우리 사회에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고 설명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