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서 '시험능력주의' 출간…'합격=재능' 현실 고찰하고 대안 제시
"교육·노동 연계해서 봐야…인력 쏠리지 않는 분야 처우 개선"
"학벌보다 실적 토대로 채용…추천제 악용땐 강한 처벌로 신뢰 회복"
김동춘 교수 "'시험=능력=공정' 한국…입시보다 구조 바꿔야"
한국사회 병폐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학벌사회'다.

대학 서열화의 상층부에 있는 명문대 출신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표현이다.

학벌사회는 치열한 대학 입시를 낳았고, 입시는 수도권 집중이나 부동산 가격 격차 같은 불균형 현상과도 연결돼 있다.

그래서 교육정책은 으레 입시제도 개편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업을 얻으려는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는 형국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31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시험능력주의' 출간 간담회에서 "입시제도를 아무리 바꿔도 시험 합격이 능력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비판적 사회학자인 김 교수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를 거쳐 교수가 됐다.

오랫동안 교육 현장에 몸담은 그는 '시험형 인간'을 길러내는 한국 교육을 정치와 사회의 지배체제라는 거시적 틀로 분석했다.

창비가 펴낸 책의 제목인 시험능력주의는 시험 합격을 곧 재능으로 보는 시각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엘리트는 대개 시험 합격 경험이 있는 명문대 혹은 고시 출신이고, 두 부류가 사회를 이끄는 메커니즘 이면에는 '노동차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추천이나 추첨은 신뢰할 수 없으니 결국 공정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험에 매달린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책에서 '명문대 시험 합격=학력(學歷·學力)·학벌→능력→사회적 지위, 차별화된 보상→공정(=정의)'이라는 공식을 제시했다.

이 도식에 따르면 첫 단추는 명문대 합격이고, '시험선수'들이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시험은 합리적 탈락이 목적입니다.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것처럼 만드는 장치죠. '아이들을 쉬게 하라'거나 '학벌이 최고가 아니다'라는 말은 현실을 도외시한 공염불입니다.

학부모들은 선택지가 없으니 입시에 몰릴 수밖에 없어요.

"
시험을 공정한 잣대로 여기는 인식은 이른바 '인국공' 사태에서 잘 드러났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보안검색 직원들을 직접 고용하기로 하자 청년들이 공정하지 않은 조처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제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대의만 생각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가 시험능력주의를 심화시킨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거듭 말했다.

고용이 불안해지고 신자유주의 물결이 유입되면서 사회 지향점도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외환위기 전에는 노동자라고 하면 육체노동자를 의미했고, 중산층은 보통 화이트칼라가 되고자 했다"며 "2000년대부터는 쉽게 잘리지 않는 직업, 즉 전문직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상위권 학생 상당수가 로스쿨과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려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정의, 협동, 공동체에 관한 의식이 외환위기로 사라져서 이제는 '내가 잘났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돈이라는 획일화된 가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동춘 교수 "'시험=능력=공정' 한국…입시보다 구조 바꿔야"
이처럼 과도한 입시와 학벌사회를 비판한 서적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다만 김 교수는 시험능력주의를 현실로 인정하고,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험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맞물려 있어 완전히 극복하기는 힘들다고 인정했다.

또 '대학 입시'라는 1차 선발과 '노동시장 진출'이라는 2차 선발 가운데 후자를 먼저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기업이나 기관이 대입 시험의 결과물인 학벌보다는 실적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뽑을 때 큰 비용을 들여 능력을 가려낼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주문했다.

이어 입시나 채용 과정에서 실적이나 성적을 부풀린 기관에 매우 강한 처벌을 가하면 추천제의 신뢰가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 방법은 2∼3년간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우려가 있어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시험능력주의는 성공 지상주의, 물질주의라는 획일적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잔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김 교수 판단이다.

그는 노동시장에서 인력이 쏠리지 않는 분야의 처우를 개선하고, 교육과 노동을 연동해서 봐야 한다고 했다.

교육과 입시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를 개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시험능력주의가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한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청년들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이걸 방치하는 건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