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인 주식 부호 순위가 요동치고 있다. 수년간 약진을 거듭해온 벤처기업인들이 주춤한 사이 전통 산업군에 속한 대기업 오너 기업인들의 순위가 다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 미국 금리 인상 및 경기 둔화 우려 등으로 성장주 주가가 쪼그라든 데 비해 꾸준히 이익을 낸 대기업 주가는 선방한 결과다.
게임 창업자 '주식부호 순위' 급락…정의선·서경배·구광모는 약진

○벤처기업인 ‘주춤’

31일 한국경제신문이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국내 상장 주식 주주 명단을 분석한 결과 국내 주식 부호 상위 25명의 주식 평가액이 77조2245억원(26일 기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말(85조1145억원) 대비 9.26% 줄어들었다. 코스피지수가 올 들어 12.26% 하락하면서 주식 가치가 감소한 영향이다.

들고 있는 주식 가치가 가장 많이 줄어든 기업인은 박관호 위메이드 이사회 의장(-55.3%)과 김대일 펄어비스 이사회 의장(-54.5%)이었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의 주식 보유 가치도 각각 30%, 40% 급감했다.

이들 기업인의 주식 가치가 뚝 떨어진 이유는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 가운데 미국발 금리 인상까지 이뤄지면서 인터넷, 게임 등 성장주 주가가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게임주는 신작의 잇따른 실패, 암호화폐 발행 리스크 등이 불거지며 낙폭을 더 키웠다는 분석이다.

성장주 급락은 주식 부자 순위에도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벤처기업인의 순위가 대거 밀렸다. 게임 ‘검은사막’을 운영하는 펄어비스의 김대일 의장은 작년 말 주식 평가액이 3조2573억원으로 12위였지만 최근 19위(1조4814억원)로 미끌어졌다. 박관호 위메이드 의장의 주식 가치도 1조4583억원 감소하며 순위가 15위에서 22위로 떨어졌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4위에서 5위(4조8177억원)로, 서정진 셀트리온 명예회장은 22위에서 25위로,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7위에서 11위로 각각 떨어졌다. 하이브는 소속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오프라인 콘서트 재개로 기대를 모았지만, 올 1분기 기대 이하의 실적을 내면서 주가를 떠받치지 못했다.

벤처기업인 중에서는 진단키트업체 에스디바이오센서 조영식 이사회 의장의 순위가 20위에서 18위(주식 평가액 1조5565억원)로 유일하게 올랐다. 자가진단키트 수요가 급증한 덕을 봤다.

○아모레·LG·HD현대 ‘약진’

벤처기업인들이 뒤로 밀린 대신 전자, 자동차, 중공업, 정유 업종 대기업을 이끄는 기업인들의 순위는 올라갔다. 현대글로비스 주식(20%) 등을 보유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주식 평가액 순위는 같은 기간 9위에서 7위로 올라갔다. 공급망 대란으로 물류비가 급증하면서 현대글로비스가 수혜를 본 덕분이다.

HD현대(옛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26.6%를 보유한 정몽준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의 순위도 27위에서 20위로 급등했다. HD현대는 고유가로 깜짝 실적을 올린 현대오일뱅크를 계열사로 두고 있다. 정유업체 SK이노베이션을 자회사로 둔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두 단계 뛴 9위에 올랐다.

하락장에서 주가를 방어한 기업 경영자의 순위도 상승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주식 평가액은 3조128억원에서 2조8793억원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순위는 14위에서 10위로 뛰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주식 가치는 1731억원 감소했지만 순위는 13위로 6계단 상승했다.

올 들어 대기업 오너 기업인들의 주식 보유 가치 순위가 상승했지만, 최근 서너 해를 놓고 보면 벤처기업인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2019년 초 주식 부자 ‘톱 25명’ 명단에 포함된 벤처기업인은 5명에 불과했지만 현재 10명으로 늘었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