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고 즐거운 파이어족, 로시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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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멀어도 창작혼을 불태웠던 베토벤, 31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1100여 곡을 남긴 슈베르트, 89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작업을 하고 있었던 미켈란젤로···. 역사에 길이 남은 예술가들의 삶을 알고 나면, 그 열정과 의지에 감탄하게 됩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이미 갖추고 있는데 엄청난 노력까지 했다니 정말 존경스럽죠.
그런데 정작 나 자신과는 거리가 먼 얘기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평소 잠도 충분히 자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유명 예술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느긋하고 즐겁게 예술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입니다. 로시니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기욤 텔' 등으로 잘 알려진 오페라 작곡가입니다. 이 작품들은 당시에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오늘날에도 자주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시니는 아직도 '게으른 음악가'로 회자될 만큼 여유롭고 느릿느릿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 37살의 나이에 과감히 은퇴를 선택해, 요즘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의 로망인 '파이어족(경제적 자립을 통해 조기 은퇴한 사람)'이 됐죠. 그럼에도 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고,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음악가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로시니는 호른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었죠. 하지만 프랑스 혁명 지지자였던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되며, 집안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생계를 위해 가족들이 페사로에서 볼로냐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요. 이곳에서 로시니는 종교음악 작곡가인 안젤로 테제이를 만나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볼로냐 음악학교에도 가게 됐죠.
로시니는 어릴 때부터 '게으르다'라는 지적을 받아 왔습니다. 수업 시간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또 천성이 워낙 긍정적이고 느긋하다 보니, 어른들 입장에선 답답한 마음에 게으르다는 꾸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돼서 작곡을 할 때의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는 주로 침대에 누워 작곡을 했습니다. 그러다 악보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면, 주우러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 다시 새로운 종이에 적었죠. 또 '13일의 금요일'을 무서워해서 그날이면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오페라를 쓰는 데 시간을 적게 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페라 주문을 6주 전에 받습니다. 그러면 앞의 4주는 실컷 놀면서 구상하고, 다음 주는 아리아와 중창을 쓰면서 보내고, 마지막 주에 관현악으로 맞춘 다음 당장 리허설을 시작한답니다."
그런 로시니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았습니다. 로시니가 만들었던 첫 오페라 '데메트리오와 폴리비오'는 원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오페라 부파(opera buffa: 희극 오페라)'에 점점 관심을 보이는 것을 간파하고 방향을 바꿨죠.
오페라에서 희극은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비극이 중심이었고 신화나 영웅담을 소재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이 조금씩 지겨워하자 본극 사이에 '인테르메초(intermezzo, 막간극)'으로 희극을 선보이는 문화가 생겨나게 됐습니다. 관객들은 처음엔 별생각 없이 인테르메초를 보다가, 어느새 크게 매료됐습니다. 본극보다 인테르메초를 기다리는 관객들도 늘어났죠. 그렇게 인테르메초는 인기를 얻게 됐고, 오페라 부파라는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로시니는 이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적극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로시니가 18살에 만든 첫 오페라 부파 '결혼 어음'은 초연 무대부터 큰 성공을 거두게 됐습니다.
물론 시련도 있었습니다. 24살에 만든 '세비야의 이발사'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희극 오페라로 꼽히지만, 초연 땐 혹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알마비마'였고,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의 희곡을 원작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로시니가 공개하기 전, 먼저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파이지엘로가 '세비야의 이발사'란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이후 로시니의 작품이 나오자 파이지엘로의 팬들이 비난을 퍼부었고, 파이지엘로를 따라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보냈죠. 하지만 파이지엘로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로시니는 다시 제목을 '세비야의 이발사'로 바꿔 무대에 올렸고 관객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알마비마 백작이 마음에 드는 여성 로지나와 결혼하려 하지만, 나이 든 후견인 때문에 가로막히며 시작됩니다. 백작은 힘들어하던 도중 운 좋게도 자신의 하인이었던 피가로를 만나게 됩니다. 세비야 이발사로 일하고 있던 피가로는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고 인기 있는 인물인지를 자랑하며 '나는 마을의 해결사(Largo al factotum)'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오페라 주인공은 보통 가장 높은 음역대인 테너가 맡았는데요. 로시니는 능청스러운 캐릭터를 잘 살리기 위해, 피가로 역에 중간 음역대인 바리톤을 배치했죠.
로시니는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점점 세게'라는 뜻의 음악 용어 '크레센도'에서 따와 '로시니 크레센도'라는 말이 생겼었는데요. 로시니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이런 기법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처음엔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다, 2중창, 3중창, 6중창까지 발전시키고 마침내 등장인물 전원을 다 동원해 합창을 하게 하는 겁니다. 관객들은 점점 눈덩이처럼 음량이 커지는 과정을 보며 즐거워하고 환호했습니다.
'세비야의 이발사' 이후에도 그는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도둑 까치' '아르미다' 등 다양한 작품이 잇달아 흥행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31살이 되던 해 파리로 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선 화려한 기교보다 잘 다듬어지고 진지한 오페라 '코린트의 포위' '오리 백작' 등을 만들었죠.
37살이 되어선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을 발표했습니다. 원작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으로, 포악한 총독의 지시로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쏴야 했던 명사수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윌리엄 텔'이지만 오페라는 프랑스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욤 텔'이 정확한 제목입니다. 이 작품은 초반엔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이후 많은 사랑을 얻게 됐습니다.
로시니는 '기욤 텔'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습니다. 이후 종교 음악을 일부 만들긴 했지만, 공식적인 음악 활동은 이로써 끝을 맺었죠. 잘나가던 음악가의 활동 중단에 대해 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아마도 오늘날의 파이어족 처럼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로시니가 누린 자유는 좋아하는 것에 진심으로 몰두하면서도, 재밌게 즐기며 다양한 시도를 했던 덕분에 얻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창작자로서의 생각에만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오페라를 봤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바를 잘 알고 작품에 녹일 수 있었던 거죠.
그는 은퇴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탈리아로 돌아가 요리에 흠뻑 빠져 지냈습니다. 원래 음식을 좋아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퇴 이후엔 직접 요리를 배워 요리책까지 썼습니다.
여러분도 하루하루를 너무 열심히 달려오진 않으셨나요. 오히려 비워냄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잊은 채 말이죠. 오늘은 로시니처럼 여유롭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는 건 어떨까요.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파란 하늘도 올려다보고 음악도 들으면서요. 숨 가쁘고 빡빡한 일상에도, 온갖 고민과 번뇌로 가득한 머리와 가슴에도 가끔 환기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