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만들려면 한 달은 걸려"…현실은 "이슈 터지면 하루 만에"
[의원입법 '홍수' 시대] ②단어 하나만 바꿔놓고 '개정안 발의'
#1. 현역 의원인 A의원은 21대 전반기 국회에서 자신이 소속된 상임위원회 소관 법률 4건의 개정안을 같은 날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법률 제목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어려운 한자나 일본식 용어를 쉬운 표현으로 고친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2건은 단어 하나씩을 바꿔놓았고, 나머지 1건은 몇몇 조항의 한자 표현을 우리말로 손질했으며 나머지 1건은 글자 수를 줄여 표현 하나를 다듬은 것이 개정 내용의 전부였다.

#2. 지난해 설 연휴를 1개월가량 앞두고 선물 가액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개정안'을 여러 의원이 발의했다.

신설 조항 번호까지 동일한 유사 법안들이 이틀 동안 3건 등장하기도 했다.

같은 해 추석 연휴 한 달여 전부터도 비슷한 취지를 담은 청탁금지법 개정안이 잇달아 나왔다.

당시에도 조항 번호가 동일하고 내용 차이가 거의 없는 유사 법안 2건이 하루 차이를 두고 발의됐다.

국회 정보공개포털을 이용해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현황을 살펴보면 이런 식의 의원입법 사례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정치권 생리를 잘 아는 이들은 일부 의원들의 이같은 법안 발의 행태를 전형적인 '꼼수'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단어 몇 개 바꾸는 수준으로 개정안을 손쉽게 여러 건 만들어 발의 실적을 부풀리고, 명절과 같은 특정 시기에 '먹힐 만한' 법안을 서로 베껴 가며 내놓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의원입법 '홍수' 시대] ②단어 하나만 바꿔놓고 '개정안 발의'
◇ 이슈 터지면 하루 만에 법안 '뚝딱'…"깊이도 철학도 없어"
국회에서 제대로 된 법안이 발의되기까지는 대체로 어느 정도의 사전 준비 기간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 전직 보좌진 등 국회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설명이다.

법안 구상은 의원이나 보좌진이 특정 주제에 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이어 소관 부처에 서면으로 자료를 요구해 회신받는 절차를 거친다.

자료가 오면 분석을 시작한다.

의원실 자체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국회입법조사처에 검토를 요청하기도 한다.

검토 결과가 정리되면 법안을 만드는 작업이 이어진다.

보좌진이 법안을 작성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이 있는 국회 법제실에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법안이 나오면 관계부처와 해당 분야 협회 등 이해관계자들과 내용을 공유하며 의견을 듣고 의원실의 최종 입장을 정한다.

'발의자 포함 최소 10명 찬성'이라는 발의 요건을 채워야 하므로 찬성하는 의원들을 찾아 내용을 설명하고 서명을 받은 뒤 법안을 제출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데 보통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슈가 발생하면 의원들이 하루 만에 '뚝딱' 법안을 만들어내라고 보좌진을 압박하는 일이 여전한 게 현실이다.

경력이 제법 쌓인 보좌진은 '영감'(보좌진이 의원을 부르는 은어)으로부터 이같은 지시를 받으면 직접 법안을 작성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법제실 관계자에게 개인적으로 통사정해 법안을 검토받는 방법까지 써 가며 법안 제출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전직 보좌관은 "법안을 내기까지는 기본적인 흐름이라는 게 있고, 짧아도 1개월 이상 검토가 필요한데 큰 이슈가 터지면 하루 만에 날림으로 법안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며 "깊이와 철학도 없이 이슈몰이와 언론에 이름 내기가 목적일 뿐이고, 그걸 만드느라 보좌진만 죽어난다"고 했다.

반면 이런 행태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 의원들의 법안 발의는 유권자인 시민 요구에 반응하는 측면도 있는 만큼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21대 국회 법안 대표발의 건수 상위권에 오른 한 현역 의원은 "우리 사회에 묵은 과제가 많고, 현장 시민들의 목소리에도 관심을 둬야 하지만 이렇게 법안을 (많이) 발의해도 목소리를 다 담지는 못한다"며 "보좌진 인력이나 의원 개인 역량, 우리 국회의 현실적·제도적 한계 때문에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입법활동을 하는 의원들이 단순히 건수를 채우려는 목적으로 법안을 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공동발의를 요청받는 법안들도 살펴보면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의원입법 '홍수' 시대] ②단어 하나만 바꿔놓고 '개정안 발의'
◇ 검토 부족했던 법안 그대로 통과…여론 악화에 재개정 해프닝도
제대로 된 검토를 거치지 않은 법안이 그대로 입법 절차를 통과해 시행됐다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점이 드러나 국민에게 혼란을 준 뒤 부랴부랴 다시 개정되는 일도 있다.

2020년 5월 국회가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끝에 개정법이 시행되기도 전 이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내용의 재개정안을 만든 것이 한 사례다.

애초 개정안은 전동 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장치(PM)가 자전거도로로 다닐 수 있게 하고, 운전면허가 없어도 전동 킥보드 운전을 허용하며 만 13세부터 운전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 6건을 심의해 만든 상임위 대안이 본회의에 올려져 재석 184명에 찬성 183명, 기권 1명으로 통과됐다.

안건의 중요도 등에 따라 의원들이 자리를 뜨기도 해 표결 인원은 안건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이 개정안은 전동 킥보드 등 PM 이용을 활성화하고 운전자 안전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마련됐으나 운전 가능 연령을 낮춘 것이 문제가 됐다.

교통안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린 청소년들이 별다른 규제 없이 전동 킥보드를 이용하다 사고를 낼 위험이 크다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PM 보급과 이용이 늘면서 교통사고가 급증한다는 통계도 있어 학부모들의 불안은 커졌다.

법 시행은 그해 12월 10일부터였지만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국회는 만 16세부터 딸 수 있는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 이상의 운전면허가 있어야 전동 킥보드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또다시 개정안을 만들어 법 시행 하루 전인 12월 9일 본회의에서 의결했다.

그러나 재개정안은 4개월간 유예기간을 둔 탓에 문제점이 지적된 기존 개정안이 한동안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회가 법 시행의 영향과 국민 여론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법안을 통과시켜 결국 국민과 정부 모두에게 혼란을 안긴 대표 사례로 꼽힌다.

[※ 글 싣는 순서]
①2년간 1만4천여건…급증하는 의원발의
②단어 하나만 바꿔놓고 '개정안 발의'
③입법권 존중 vs 좋은 법안…균형점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