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집중심리와 전자소송

효율적인 사건처리를 위해서 집중심리가 필요하다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억이 살아있고 사건에 관한 이해가 도달했을 때 가급적 빨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인체의 두뇌구조상 효율적인 업무처리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결국 집중심리도 그러한 일환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종이소송구조하에서는 집중심리가 쉽지 않다. 집중심리는 압축되고 컴팩트한 재판진행이 바탕이 되어야하는데, 전자문서 이동에 비해종이서류의 이동은 물리적인 시간이라는 면에서 훨씬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어 집중심리를 구현하는데 장애가 되어왔다. 예를들어, 재판기일 일주일 전에 어느 일방이 주장서면을 법원에 제출했다고 하자. 재판기일에서 가급적 압축되고 밀도있는 주장이 오가면서 공전(空轉)되지 않으려면 제출된 서면은 가급적 상대방에게 빨리 전달되어서 상대방의 입장도 재판기일 전에 법원에 전달될 필요가 있는데, 지금과 같은 종이소송구조하에서는 우편송달이라는 한계 때문에 재판기일 임박해서 접수된 서면은 상대방에게 송달하기 어려워서 출석한 재판기일에 직접 교부하거나 아니면 우편송달을 하더라도 겨우 재판기일 하루, 이틀 전쯤에 도달되어서 상대방이 재반박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부족하게된다. 법원 내부적으로도, 서면이 재판기일 임박해서 접수되면 법원접수계를 거쳐 판사실에 오게 되는 내부절차와 물리적인 이동시간 등으로 당사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재판기일에 판사가 서면을 읽고 재판에 참여하기가 힘들게 된다.
그 결과, 제출된 주장에 대해서 공방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재판기일이 사실상 공전되고 다시 다른 재판기일을 지정하게되면서 재판종결 지연으로 이어지게 되는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일이 지체되면 판사로서는 한번 형성한 기억과 사건에 대한 이해를 심리를 종결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기가 어렵게되면서 집중심리를 위해서는 재판 도중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기록을 검토해야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데, 업무량이 많아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실제로 많은 판사들은 재판 도중에 꼼꼼한 기록검토를 포기한 채 변론이 종결된 이후에서야 자세한 기록파악의 시간을 가지는 방식으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재판 도중에는 사건이 완전하게 파악되지 못해 불필요한 기일이 지정되거나 불필요한 증거를 채택하는 등의 미흡한 재판진행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는 심리가 미진한 상태에서 재판을 종결하고서, 예정된 선고기일 임박해서 다시 변론을 재개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재판 도중에 사건파악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국민들 입장에서는 지지부진하게 재판이 진행되는 것도 모자라 어렵게 마친 심리가 다시 재개되는 등 재판 진행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판사가 사건 상대방과 무슨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나’하는 불신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런 부실한 재판이야말로 사법부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인 셈이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사건파악을 바탕으로 집중심리형식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당사자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일텐데, 전자소송이 본격화되면 집중심리구현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전자소송구조에서는 문서의 법원접수와 동시에 상대방 송달이 가능해져서 재판기일이 보다 짜임새있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재판횟수를 줄이고, 결과적으로는 빠른 재판종결에 도달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아울러 송달시간이 단축되면 송달기일을 감안해서 정해지는 다음 재판기일 지정도 훨씬 짧게 정할 수 있어, 집중심리의 토대가 되는 신속한 재판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집중심리의 일환으로 현재의 선고제도 개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재판의 마무리는 판단인데, 변론(심문)종결 당시에 최고조에 달한 사건파악에 관한 심증을 바로 판단으로 연결하면서 재판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선고기일을 별도로 정해 판결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선고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 대신에 심리를 종결한 후에 판결문을 서버에 올려 사건당사자에게 송달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면, 집중심리에 이은 사건의 최종적인 종결단계에 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처럼 선고기일을 별도로 정하게 되면 아무래도 판단과정의 변수를 생각해서 다소간의 시간적인 여유를 정해서 기일을 정하게 되는데, 그 결과 심리를 종결하면서 무르익은 기억을 그대로 판결에 연결하고 재판을 마치는데 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다. 심리를 마칠 당시에 이미 기록이 완전히 검토된 단계라면 바로 판결문작성단계에 돌입해서 그 다음날이라도 판단을 내리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획일적인 선고기일 제도하에서는 이런 업무방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결과, 재판을 하는 판사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심리를 종결한 후 지금처럼 최소한 2주 이상 이후에 선고기일을 잡아야하는 것이라면 굳이 미리 사건파악을 한 다음에 선고를 위해 기록을 재검토해야하는 이중수고를 겪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할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충실한 심리를 위해서는 사건이해도의 정점은 심리를 마치는 시점 무렵인 것이 바람직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바로 판결서 작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상적인데, 선고일자를 별도로 정하게 되면 심리를 마치는 시점과 선고하는 시점의 차이 때문에 심리를 마치는 시점에 사건이해도가 최고조될 수 없는 가능성이 커진다. 대부분의 업무처리는 최종적인 마감시간을 기준으로 그 직전에 에너지를 모으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지금처럼 선고기일을 별도로 정하는 방식이라면 사건이해도의 최고조는 심리종결 시점이 아닌 선고기일 무렵이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당사자로서도 마찬가지로, 심리종결 후에 다음날이라도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고 하면 심리종결을 의식해서 심리종결 이전에 주장과 증거가 현출될 수 있도록 집중할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처럼 심리종결 이후에 2주 이상 후 선고기일을 통해서만 판정이 난다고 한다면, 심리가 종결된 후에도 추가로 주장을 하거나 증거를 제출하고 필요하면 재판재개까지 요구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심리종결을 크게 의식하지 않게된다. 당사자의 이런 재판 태도는 집중심리를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지금의 선고제도는 법원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집중심리를 막는 구조적인 장애요소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방식은 법원업무 경감 뿐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만족도를 높이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사건 당사자는 재판을 마친다(변론 내지 심문종결)는 것과 별도로 약 1달 후에 선고기일이 정해진다는 자체를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재판을 이렇게 오래 진행해왔는데 바로 판단을 하지 않고 약 1달이나 되는 시점 이후에나 최종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납득하지 못한다. 게다가, 선고되는 날도 판결의 결론만 확인할 수 있고, 결론이 내려진 이유에 대해서는 선고일로부터도 약 1주일 가량을 더 기다려야만 하는 현실이 당사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현 시스템하에서 판결문을 송달받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이기는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판결을 선고받고도 바로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판결문송달 기간 동안은 상소 여부조차 결정할 수 없는 불편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

한편, 선고기일을 별도로 정하는 지금의 제도는 선고기일을 정하지 않게되면 법원이 장기간 판단을 미룰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정된 것인데, 이 문제는 심리를 종결한 후 최종적인 판단 마감시한을 법규로 정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므로, 선고지연이라는 문제 때문에 굳이 특정한 선고기일을 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결국, 법원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업무처리에 반하고, 당사자에게는 시간적으로도 늦으면서 이유도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지금의 선고제도는 아예 폐지하거나 중요사건 등으로 한정하면서, 대부분의 사건은 선고없이 판결문을 바로 서버에 등재해서 당사자가 바로 열람가능토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신청사건의 경우 선고없이 바로 결정문을 송달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별다른 문제도 없고, 오히려 판단의 이유까지 일거에 확인할 수는 장점이 있지 않는가?


※ 칼럼에서 인용된 판결의 전문은 최광석 변호사의 홈페이지인 www.lawtis.com 에서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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