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진행 중인 서울 관악구 다가구 주택 세입자 몇 명으로부터 최근 중개업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의뢰받았다. 이들은 20여 가구가 있는 다가구 주택의 후순위 세입자들로서 입주 과정에서 중개업자로부터 주택 시세에 비해 적은 금액의 선순위 근저당권만에 대해서만 설명들었을 뿐, 다른 세입자 보증금 문제가 보증금반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 후, 해당 다가구 주택이 경매에 처해지면서 의뢰인들보다 다가구 주택에 빨리 입주한 세입자들의 보증금 때문에 상대적으로 늦게 입주한 의뢰인들의 보증금 반환은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집에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하게 되는 후순위 세입자들 중 젊은 여자 변호사가 한명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검토 없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이 변호사는 다른 세입자들과 연대하지 않은 채 조용히 혼자서 소송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사는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못하고, 변호사는 사기당해도 피해사실을 하소연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주위의 비아냥 때문일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필자 역시 다가구 주택 임대차에 얽힌 과거의 부끄럽고 어두운 역사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거의 20년 전이지만, 좋은 일도 아니고 주위의 비아냥도 부담스러워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는데, 위 여자 변호사처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다가구 주택 임대차문제로 계속 피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주의환기 차원에서 공개하게 되었다.

로펌의 신입변호사로 있을 때 필자는 신혼집으로 서울 우장산역 근처 화곡동 다가구 주택 402호를 보증금 8천만 원에 임대차했다. 신축이라 집이 깨끗하고 지하철역 근처라 입지여건이 좋은데다가, 등기부상 저당권 등 아무런 제한물권이 없어 권리관계마저 맘에 들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 집이 경매에 처해지게 되어서야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해당 다가구주택의 경매 감정가는 5억5천만 원이지만, 세입자 보증금 합계는 6억1천만 원...신축된 건물에 시세에 육박하는 세입자들의 보증금이 들어왔는데, 시간이 흘러 감가상각 등의 영향으로 건물시세가 내려가면서 건물가격이 보증금총액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선순위 저당권 등이 전혀 없다보니 모든 세입자들에게는 대항력이 있어 이 때문에 낙찰이 되지 못하고 계속 유찰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말았다. 세입자 대항력 때문에 낙찰자는 최소한 보증금 전액을 책임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증금 총액 보다 낮은 감정가를 감안할 때 낙찰이 될 수 없었고, 결국 유찰을 거듭하다가 남을 가망성이 없는 경매로 경매가 취소되고 말았다.


★ 민사집행법 제102조(남을 가망이 없을 경우의 경매취소)
① 법원은 최저매각가격으로 압류채권자의 채권에 우선하는 부동산의 모든 부담과 절차비용을 변제하면 남을 것이 없겠다고 인정한 때에는 압류채권자에게 이를 통지하여야 한다.
② 압류채권자가 제1항의 통지를 받은 날부터 1주 이내에 제1항의 부담과 비용을 변제하고 남을 만한 가격을 정하여 그 가격에 맞는 매수신고가 없을 때에는 자기가 그 가격으로 매수하겠다고 신청하면서 충분한 보증을 제공하지 아니하면, 법원은 경매절차를 취소하여야 한다.


경매 진행 자체가 불가하고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 꼼짝없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은 더 이상 이사를 미룰 수 없는 사정이 생겨 보증금을 받지도 못한 채 임차권등기만 해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마음이 더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몇 년 후 다시 진행된 경매에서 드디어 낙찰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전체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해 대항력 있는 세입자 보증금 6억1천만원을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해당 다가구 주택을 매수하는 낙찰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집값 상승이라는 행운이 도와준 덕분인데, 다가구 주택 법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권리관계가 깨끗한 집으로만 생각하고 덜컥 임대차계약을 했다가 당하게 된 참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보증금을 돌려받기까지 소소한 에피소드가 몇가지 더 있었다.

먼저, 화곡동 보증금 반환청구 소송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내 앞가림을 하기 위해 변호사로 본인 소송을 해야 하는 상황이 창피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집주인을 피고로 하여 서울 남부법원에 보증금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기일에 법정에서 대기하다가, “원고 최광석”이라는 재판장의 호명을 듣고 쭈볏거리며 원고 당사자석에 서게 되었다. 피고도 출석하지 않아서 빨리 재판을 끝내고 나오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마침 담당 재판장은 필자와 안면이 있는 분이었는데, 이 재판장 왈 “소송대리인이 아니라 원고 본인이면 당사자석에서 나오셔야 하는거 아닌가요”라고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소송대리를 하던 습관대로 소송대리인(변호사)석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갔는데, ‘원고 본인 자격인데도 소송대리인석에서 나오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해 보인다’, ‘변호사가 사건 본인이 되어 마음이 안쓰럽다’는 등등의 마음이 배어 있는 뼈있는 농담이었다.

보증금 때문에 교통사고가 날 뻔한 경험도 있었다. 연락두절인 집주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겠다는 일념으로 집주인을 찾아나섰다. 집주인의 주소는 전라북도 순창... 당시에는 내비게이션도 제대로 없어 종이지도를 보면서 굽이굽이 순창의 산길을 돌던 중 급커브 골짜기에 추락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 있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피해 없이 보증금 전액을 반환받았고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내 인생에서 각별(?)한 경험을 하면서 수 년간 해결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했기 때문인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상-



※ 칼럼에서 인용된 판결의 전문은 최광석 변호사의 홈페이지인 www.lawtis.com 에서 참고하세요.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