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를 꼼꼼하게 확인해야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통할 정도로 널리 이해되고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천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확인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계약서를 눈으로 하나하나 읽어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약서를 읽으면서 계약서에 담긴 구체적인 문구의 숨어있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계약내용이 실천되지 않았을 경우 대책이 있는지 하는 것들까지 고민해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사람들은 비록 거액이 오고가는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계약서의 내용에 대해 금액에 걸맞는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이런 현상은 계약내용이 이미 활자화된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표준화된 서식에 더해서 작성되는 특약사항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이미 서식으로 활자화된 계약내용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심코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활자화된 내용은 자기 뿐 아니라 널리 다른 사람도 함께 사용하는 것이니만큼, 설마 별다른 문제가 있을까하는 마음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당사자간의 구체적인 합의가 어떠했는지를 해석함에 있어 서식화된 문구는 특약사항과 비교해서 다소 다른 판단을 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서식화된 문구 역시 기본적으로는 엄연한 계약내용의 일부인 것이다. 즉, 서식화된 문구일지라도 기본적으로는 계약내용임에 틀림없고, 서식화된 내용에서 부족한 부분을 특약사항으로 작성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식화된 문구 역시 특약사항과 배치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기본적으로는 계약의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에 포함된 서식화된 문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주의는 현저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종전에 다른 칼럼을 통해 예로 들었던 위약금과 해약금문구에 대한 오해도 바로 이러한 무관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에서 위약금문구가 없으면 계약의 실효성이 현저히 떨어져서 위약금문구가 당연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표준계약서상에 적힌 단순한 해약금문구만을 믿고 아무 생각없이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사례는, 서식화된 문구의 중요함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될 수 있다. 몇 년 전에 서울 구로구에서 분양된 모 상가의 분양계약서 내용이 소송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 상가의 경우 비록 여러 언론매체를 통한 광고상으로는 마치 분양계약 이후 2년 6개월 이후에는 입점이 가능한 것처럼 표시되었지만, 막상 분양계약서상에는 입점일의 표시를 “공사착공일로부터 42개월”이라고 서식화된 문구로 조그맣게 명시되었다. 당시 수분양자들로서는 공사착공이 조만간 가능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의문없이 분양계약서에 날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측이 사업부지확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분양계약 후 무려 3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공사착공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결국 분양광고상에서 언급한 입점예정일을 몇 년씩이나 도과해서야 입점이 가능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부 수분양자들은 당초 광고상에서 회사가 언급한 입점예정일을 믿고 분양계약을 했으므로 광고상에서 표시된 입점예정일이 바로 분양계약상 합의된 입점일로 해석해야하고, 이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체된 만큼 분양계약은 해제되었으므로 회사는 분양대금을 반환해야한다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이 사건에서는 과연 분양계약상 당사자간에 합의된 “입점(준공)일”을 해석함에 있어, 광고된 입점예정일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아니면 분양계약서상 명시된 “착공일로부터 42개월”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재판결과, 1심 법원은 수분양자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분양계약서상 표시된 “착공일로부터 42개월”이 당사자간에 합의된 입점일로 해석해야한다고 판단하였다. 1심법원의 판단은, 광고상의 표시는 어디까지는 단순한 예상일 뿐이고, 계약서상 명시된 부분이 법률상의 합의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사건은 수분양자들이 항소하여 상급심에 계류 중에 있고 상급심에서는 다른 판단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서식화된 문구라고 하더라도 계약서상에 표시된 내용이 실제 재판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수분양자들 입장에서는, 부지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분양회사측에서 수분양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고서 광고와 분양계약서상의 표시를 고의적으로 다르게 했다고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고, 분양계약서상에 미리 활자화되어 조그맣게 된 표시보다는 광고상의 문구를 더 염두에 두고서 계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계약상 입점일을 광고에서 표시된 기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간 합의하여 도장을 날인한 분양계약서상의 명시된 표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분양계약당시 수분양자들이 입점일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면, 회사측에 요구해서 공사착공일의 예정일을 특약사항으로 기재해 둘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경우에는 기재된 공사착공예정일로부터 42개월이 지난 시점이 바로 약정된 입점(준공)일로 해석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계약서내용을 검토함에 있어서는 특약사항 뿐 아니라 서식화된 문구에도 세심하게 주의하여야 하고, 만약 인쇄된 문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상대방에게 수정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특약사항으로 약속내용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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