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판사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사 나가는 과정에서 임대인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를 얻어 살던 집을 이사하면서 보증금을 받아 다른 곳에 보증금을 보태야하는데, 그동안 아무 이야기가 없다가 느닷없이 보증금을 돌려받기로 예정된 날에 임대인으로부터 ‘임대차기간 도중에 벽지에 발생한 곰팡이 문제를 해결하는 도배비용으로 50만원을 보증금에서 공제하겠다’는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이 친구 입장에서는, 임대차기간 도중에 임대차목적물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발생한 것이고, 그 범위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서 도배비용을 임차인이 부담하는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 보증금을 지급할 수 없어 계약이 파기되는 등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임대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지도 못하고 좋은 말로 설득해서 결국 도배비용 30만원을 임차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 본 다음에 나머지 보증금을 돌려받았다고 했다.
우리 임대차관계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그래도 임차인이 판사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어서 이 정도에서 해결될 수 있었지,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임대인의 부당한 요구를 꼼짝없이 그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처럼, 당장 보증금을 받아야만 하는 임차인의 급박한 처지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부당한 이유로 보증금을 공제하는 악덕 임대인이 적지 않다. 이런 임대인들 중에는 ‘자신의 공제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문제된 금액 뿐 아니라 보증금전체를 돌려주지 않겠다’는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문제된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위에서 본 사례에서 도배비용 50만원만 공제한 나머지 금액은 일단 반환해주어야 하는 것이 타당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면 보증금전체를 돌려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문제된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를 돌려주게 되면 향후 공제한 금액을 두고 임차인으로부터 분쟁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보증금전체를 볼모로 잡고 임차인 주장을 굴복시키는 일종의 “협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쟁의 대부분이 보증금 전체에 비해 소소한 금액들이라서, 재판으로 다투기가 적당치 않아 송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실제 분쟁건수에 비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원상복구비용 등과 같이 금액이 적지 않은 경우에는 재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임대인의 부당한 요구를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임차인의 처지도 이해되지만, 무턱대고 임대인의 횡포에 당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임차인 입장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자기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문제된 부분이 보증금 중 극히 일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보증금전체의 반환을 거부하는 임대인에 대해서는, ‘보증금을 즉시 돌려받지 못하면 어떤 어떤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취지로 자세하게 기재된 통고서를 임대인에게 보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임차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손해의 배상책임이 임대인에게 부담될 수 있다는 인식을 임대인으로 하여금 가지게끔 한다면, 문제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보증금은 즉시 돌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보증금을 돌려받은 다음에는 보다 여유있는 마음으로 임대인과 협상하거나 재판할 수 있어 훨씬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런 분쟁유형들 중에서 액수가 크고 서로간의 시각이 크게 차이가 있어 재판도 적지않은 “원상복구”의 범위의 문제에 대해 판례는, 임차인이 필요한 원상복구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부담할 손해배상액수는, 임대인이 실제로 원상복구를 완료한 시점까지가 아니라 임대인 스스로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던” 시점까지의 임대료 상당액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법원 1990. 10. 30. 선고 90다카12035호), 원상복구의 범위나 액수에 관해서 다툼이 있다고해서 임대차목적물을 계속 점유하면서 시간을 지체할 것이 아니라 일단 다툼이 되고 있는 원상복구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명도는 모두 이행한 다음에 이러한 사실을 임대인에게 분명하게 통보해서, 불필요한 임대료부담을 중단시킬 필요가 있다. 협상과정이라도 일단 점유가 계속되면 임대료를 계속 부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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