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신탁 약정을 맺고 타인의 명의를 빌려 토지 등기를 한 사람은 설령 실소유주라 할지라도 부동산 소유권을 취득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숨진 A씨의 유가족이 B씨 등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A씨는 1997년 B씨와 명의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A씨가 B씨 명의로 한국농어촌공사에서 토지를 사들인 것이다. B씨는 토지를 사기 위해 농어촌공사의 대출을 받았고, A씨가 대출 원리금 5000만원을 B씨에게 줘 갚게 했다.

A씨는 이후 20년 동안 B씨 명의의 토지를 경작해 왔다. 그동안 토지 명의는 2009년 한 영농조합에, 2015~2017년에는 C씨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A씨가 세상을 떠난 뒤 벌어졌다. 1995년 제정된 부동산실명법은 실소유자가 어떤 이유로 부동산을 타인 명의로 해뒀더라도 소유권을 인정해준 종래의 명의신탁 약정을 무효로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A씨의 부인과 자녀들은 “명의신탁자의 소유권이 없더라도 A씨의 점유취득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에 소유권을 넘겨줘야 한다”며 소유권 이전등기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점유취득시효란 소유 의사를 갖고 20년 동안 평온하고 공공연하게 부동산을 점유한 경우, 그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A씨가 20년 넘게 토지를 경작해 왔으니, 해당 땅이 현재 누구의 소유로 등록됐는지와는 상관없이 땅은 A씨 유족들의 소유라는 것이다.

1·2심은 A씨 유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점유할 당시 자신이 소유한다는 인식 및 의사가 인정돼야 한다”며 “A씨는 명의신탁자로서 자신의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면서도 토지를 점유했다”고 설명했다.

즉 점유취득시효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소유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A씨가 명의신탁계약을 하면 소유권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토지를 점유한 것은 ‘소유 의사가 있는 점유’가 아니라는 취지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