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과 바이올린의 연주…사진과 그림의 선율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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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명작 유레카
美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
연관성 없는 요소를 연결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
역대 최고가 사진 기록한
'앵그르의 바이올린'
그림 '목욕하는 여인' 오마주
누드와 악기의 곡선에 감탄
사진과 회화 결합, 예술로 격상
美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
연관성 없는 요소를 연결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
역대 최고가 사진 기록한
'앵그르의 바이올린'
그림 '목욕하는 여인' 오마주
누드와 악기의 곡선에 감탄
사진과 회화 결합, 예술로 격상
“아이디어는 연결고리다. 그래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별개의 현상들이 눈에 띄지 않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때 흥미를 느낀다. 아이디어는 또한 익숙한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를 뒤집어서 완전히 새로운 각도, 즉 생소한 깨우침을 주는 시각으로 보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미국 심리학자 도널드 클리프턴의 말이다.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1890~1976)는 외견상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 새로운 각도에서 세계를 보는 방법을 제시한 예술가다. 만 레이의 대표작 ‘앵그르의 바이올린’(1924)은 그가 서로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터키식 터번을 쓴 나체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이 흑백사진은 지난 5월 14일 크리스티경매에서 1240만달러(약 159억2780만원)에 최종 낙찰돼 사진으로는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사진도 천문학적 가격에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여성의 허리 양쪽에 바이올린 앞판에 뚫려 있는 f자 모양의 두 울림구멍이 새겨져 있다. 만 레이는 흑백사진으로 인화된 여성의 허리에 f홀을 그려 넣은 뒤 다시 사진을 찍어 작품을 완성했다.
여체와 바이올린은 외견상으로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누드작품에 새겨진 f홀은 여체와 바이올린이 닮은 형태라는 느낌을 준다. ‘바이올린이 여성의 몸을 본떠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드의 곡선과 악기의 곡선이 매우 유사하다. 또한 둘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균형과 조화, 비례, 대칭을 통해 이상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고전 누드화는 ‘서양미술사의 꽃’, 형태와 원리, 음향학적인 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악기의 여왕’으로 불린다. 만 레이가 여성 누드와 바이올린을 결합한 독창적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만 레이는 20세기 초반 가장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운동이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핵심 인물이었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살육과 폭력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인습에 도전하며 새로운 형태의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만 레이는 인간 내면의 강력한 힘인 잠재의식을 계발해 이성에 의해 억압된 생각과 감정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개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우연성, 자발성, 즉흥성, 자유연상의 유희를 통한 예술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서로 다른 개별 요소들을 비합리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학이 반영된 걸작이다.
다음으로 이 작품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오마주는 프랑스어로 존경, 감사를 뜻하며 예술에서는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원작의 표현 방식을 차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전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앵그르의 누드화는 미술의 전통을 거부한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특히 만 레이는 탁월한 형태미와 엄격한 구도, 완벽한 기교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앵그르의 누드화에 깊이 감명했다. 앵그르가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점도 여성 누드와 바이올린의 결합에 영감을 줬다. 만 레이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여성 누드화로 구현한 거장에게 오마주 작품으로 경의를 표한 것이다. 끝으로 당시 만 레이에게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뮤즈’로 불린 연인이 있었다. 이 작품의 모델인 ‘키키’(본명 알리스 프랭)다. 1921년 만 레이는 미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몽파르나스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이자 배우, 화가인 키키와 사랑에 빠졌다.
‘몽파르나스 여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키키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키슬링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뮤즈였다. 두 사람이 6년 동안 연인 사이였을 때 키키는 만 레이의 모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고 최고 수준의 작품들이 태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만 레이는 사진이 이미지의 재생과 복제의 수단으로만 인식되던 시절, 사진의 매체적 기술적 특성에 주목하며 사진과 회화를 결합해 예술로 격상시킨 선구자다. 그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만들어내는 혁신적 기법인 레이오그래프를 개발하는 등 사진의 표현 영역을 확장한 업적을 남겼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1890~1976)는 외견상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 새로운 각도에서 세계를 보는 방법을 제시한 예술가다. 만 레이의 대표작 ‘앵그르의 바이올린’(1924)은 그가 서로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터키식 터번을 쓴 나체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이 흑백사진은 지난 5월 14일 크리스티경매에서 1240만달러(약 159억2780만원)에 최종 낙찰돼 사진으로는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사진도 천문학적 가격에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여성의 허리 양쪽에 바이올린 앞판에 뚫려 있는 f자 모양의 두 울림구멍이 새겨져 있다. 만 레이는 흑백사진으로 인화된 여성의 허리에 f홀을 그려 넣은 뒤 다시 사진을 찍어 작품을 완성했다.
여체와 바이올린은 외견상으로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누드작품에 새겨진 f홀은 여체와 바이올린이 닮은 형태라는 느낌을 준다. ‘바이올린이 여성의 몸을 본떠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드의 곡선과 악기의 곡선이 매우 유사하다. 또한 둘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균형과 조화, 비례, 대칭을 통해 이상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고전 누드화는 ‘서양미술사의 꽃’, 형태와 원리, 음향학적인 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진 바이올린은 ‘악기의 여왕’으로 불린다. 만 레이가 여성 누드와 바이올린을 결합한 독창적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만 레이는 20세기 초반 가장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운동이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핵심 인물이었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살육과 폭력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인습에 도전하며 새로운 형태의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만 레이는 인간 내면의 강력한 힘인 잠재의식을 계발해 이성에 의해 억압된 생각과 감정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개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우연성, 자발성, 즉흥성, 자유연상의 유희를 통한 예술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서로 다른 개별 요소들을 비합리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학이 반영된 걸작이다.
다음으로 이 작품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오마주는 프랑스어로 존경, 감사를 뜻하며 예술에서는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원작의 표현 방식을 차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전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앵그르의 누드화는 미술의 전통을 거부한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특히 만 레이는 탁월한 형태미와 엄격한 구도, 완벽한 기교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앵그르의 누드화에 깊이 감명했다. 앵그르가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점도 여성 누드와 바이올린의 결합에 영감을 줬다. 만 레이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여성 누드화로 구현한 거장에게 오마주 작품으로 경의를 표한 것이다. 끝으로 당시 만 레이에게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뮤즈’로 불린 연인이 있었다. 이 작품의 모델인 ‘키키’(본명 알리스 프랭)다. 1921년 만 레이는 미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몽파르나스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이자 배우, 화가인 키키와 사랑에 빠졌다.
‘몽파르나스 여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키키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키슬링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뮤즈였다. 두 사람이 6년 동안 연인 사이였을 때 키키는 만 레이의 모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고 최고 수준의 작품들이 태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만 레이는 사진이 이미지의 재생과 복제의 수단으로만 인식되던 시절, 사진의 매체적 기술적 특성에 주목하며 사진과 회화를 결합해 예술로 격상시킨 선구자다. 그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만들어내는 혁신적 기법인 레이오그래프를 개발하는 등 사진의 표현 영역을 확장한 업적을 남겼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