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패션 부문 대표 브랜드인 ‘빈폴’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30년 가까이 텃밭이나 다름없던 트래디셔널(TD) 캐주얼 패션 부문에서 지난해 처음으로 ‘폴로 랄프로렌’에 1위 자리를 내줬다.

‘빈폴골프’는 골프복 시장에서 상위 10위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멀티 호밍(multi-homing·다양한 플랫폼 혹은 브랜드를 자유롭게 소비하는 현상)’ 시대에 변화에 둔감한 토종 브랜드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빈폴은 ‘아저씨 골프복?’

'아저씨 패션' 이미지 못 벗어…'30년 1위' 뺏긴 빈폴의 수모
9일 유통·패션업계에 따르면 TD 캐주얼 부문에서 폴로 랄프로렌이 국내 판매량 1위를 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점업계 관계자는 “올 1분기 기준으로 폴로 랄프로렌의 판매량을 100이라고 한다면 빈폴은 80 수준”이라며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빈폴은 1989년 첫선을 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해외 브랜드에 의존하던 정통 캐주얼 시장에 파란을 일으키며 줄곧 1위 자리를 수성했다.

패션업계에선 코로나19로 해외 여행길이 막힌 소비자들이 지갑을 활짝 열면서 가격이 더 비싼 폴로가 빈폴을 역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폴로 랄프로렌은 2010년대 초 두산그룹이 갖고 있던 한국 판권을 회수하면서 직진출로 전환했다”며 “국내 백화점과의 갈등으로 한동안 성장 정체를 겪었는데, 코로나19로 수요가 갑자기 폭발했다”고 말했다.

빈폴의 추락은 연관 브랜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빈폴골프가 대표적이다. 빈폴골프는 4대 메이저대회로 불리는 디 오픈 챔피언십과 제휴를 맺고 ‘디 오픈’이라는 로고를 접목해 토종 골프웨어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작년 판매액은 1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25위인 코오롱FnC의 ‘엘로드’가 작년 한 해 126억원어치를 판매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빈폴골프의 판매액은 400억원을 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캘러웨이’(지난해 매출 추정치 1523억원), ‘타이틀리스트’(1270억원), ‘파리게이츠’(1257억원) 같은 ‘빅3’의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빈폴골프는 올 1분기에도 20위권”이라고 설명했다.

○“해외 브랜드에 집중하다 보니…”

빈폴은 2019년 브랜드 론칭 3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삼성물산은 스스로 “이름만 빼고 다 바꿨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에 방점을 찍었다.

1960~1970년대 감성을 재해석한 ‘한국적 클래식’을 새로운 브랜드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캐주얼 브랜드로 변신한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코로나 변수’로 빈폴의 실험은 공염불이 돼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물산이 브랜드 관리에 소홀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빈폴의 위상이 워낙 탄탄해 삼성물산이 빈폴 브랜드를 남용한 측면이 있다”며 “키즈, 골프 등으로 외연을 넓히려다 되레 브랜드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를 자초했다”고 말했다.

빈폴골프만 해도 빈폴이라는 30년 넘게 변하지 않는 이미지에 갇혀 있다 보니, 자유롭게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작년에 타이틀리스트, PXG, 캘러웨이 등 골프채 전문 브랜드들이 내놓은 전문가형 골프웨어가 인기를 끌었다면 최근엔 지포어, 말본골프 같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건너온 패션형 골프웨어가 백화점 판매량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단일 매장으로는 국내 최대 매출을 자랑하는 신세계 서울 강남점에서 골프웨어 1, 2위가 지포어와 말본골프”라고 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주력이 ‘아미’ 등 수입 브랜드로 바뀐 점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올 하반기부터는 빈폴에 대한 대대적인 마케팅을 준비 중”이라며 “빈폴골프도 강다나 프로 등 인플루언서를 내세워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