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싸구려 경제학'에 빠진 대가
인플레이션이 40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걸핏하면 ‘I가 온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근 100년 사이 진짜 인플레이션은 세 차례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오일쇼크 때다. 물론 ‘구조적인 장기 물가상승’이라는 정통적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미국과 유로존 물가상승률은 나란히 8%대까지 치솟았다. 미국은 40년 만에, 유로존은 통계 집계(1997년) 이후 최고치다. 이 추세가 고착화한다면 우리는 네 번째 인플레와 마주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인플레는 세상 질서를 바꾼 트리거였다는 점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나치즘은 인플레이션의 사생아’라는 주장이 정설이고, 재스민 혁명으로 유명한 10여 년 전 ‘아랍의 봄’도 식량가격 급등에서 촉발됐다.

사실 현대 경제학은 인플레를 통제 가능한 ‘마이너 변수’로 봐왔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전설 폴 볼커 전 의장이 ‘무자비한 금리 인상’이라는 특효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의장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연초까지 “인플레는 일시적이며, 우리는 대응수단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렇게 ‘손쉬운 상대’인데 어쩌다가 통제불능을 걱정하게 됐을까. 글로벌 공급망 훼손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많이 꼽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싸구려(schlock) 경제학’의 범람이다. 싸구려 경제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 교수가 오바마 정부의 재정 퍼붓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꺼내든 용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부터 8500억달러의 사상 최대 부양책을 내놓는 등 임기 내내 ‘돈 풀기’로 내달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오바마의 길로 갔다. 특히 바이든은 ‘중도 좌파 케인지언’ 옐런 장관을 앞세워 취임과 동시에 1조9000억달러의 대규모 부양책을 투하했다.

Fed의 잘못도 크다. 파월 의장은 자산가치를 떠받쳐 온 전통의 ‘Fed 풋’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통화긴축에 실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2008년 35.2%에 그쳤던 국가채무비율은 작년 말 104.4%로 3배가 됐다. 과격한 재정 투입과 느슨한 통화관리가 초래한 누적 부실이 깊이 잠들었던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깨운 일등공신이 됐다.

파월과 옐런은 오판을 인정하는 굴욕을 감내하면서 이제 인플레 때려잡기에 올인 중이다. 절체절명의 승부다. 인플레가 통제불능으로 전개되면 미국의 ‘G1 지위’는 물론이고 중앙은행 시스템 신뢰마저 위협받을 가능성이 크다.

싸구려 경제학에 관한 한 한국도 넘사벽 수준을 자랑한다. 국적불명의 ‘소주성’을 앞세워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현금을 뿌렸다. 매년 초슈퍼예산을 짠 것도 모자라 추경을 10번이나 편성해 혈세 156조원을 추가 살포했다. 그 결과가 ‘싱크홀 국고’와 14년 만의 ‘5%대 물가’다. 임금 인상발 인플레도 본격화했다. 물가에 자극받은 근로자들이 급여 인상을 요구하고, 오른 임금이 다시 물가를 자극하는 악순환이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윤석열 정부도 하나 다를 것 없다. 싱크홀을 탄식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62조원의 사상 최대 추경을 밀어붙였다. 한 번 추경에 한 해 국방비(55조원)보다 큰 돈을 쓰는 건 아무리 급한 자영업 사정이 있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추경 재원이 된 초과 세수 53조원도 턱밑까지 차오른 나랏빚 상환에 우선 투입하는 게 정석이다.

향후 5년간 1000조원의 기록적 투자 구상을 밝힌 대기업들의 각 잡힌 행보에서도 싸구려 내음이 진동한다. 수틀리면 탈탈 털어버리는 검찰 수사로 생긴 트라우마 탓에 내놓은 자진납세형 투자라면 졸속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원칙마저 가볍게 무시한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결정에서도 저렴한 포퓰리즘의 기운이 충만하다. 윤 대통령은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고 했다. 안마당까지 닥친 태풍에 맞서려면 싸구려 경제학부터 손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