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된 첫 딸 '마야'가 5세~7세 사이 피카소와 작업
'선 하나로 그린 독수리' '우화 속 포도와 여우' 등
"2차 대전 중 물감 캔버스 없어 부엌에서 낙서했던 흔적"
피카소가 첫째딸에게 드로잉과 채색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스케치북이 최초 공개돼 화제다. 영국 가디언 등은 “피카소의 손녀가 그 동안 미공개 됐던 그의 스케치북을 가족 전용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공개됐다”고 12일(현지시간) 전했다.
피카소는 큰 딸 마야 루이즈 피카소가 5세~7세일 때 이 스케치북을 제작했다. 일부 페이지에는 딸과 피카소가 함께 그린 스케치 흔적도 남아있다. 아버지의 그림에 점수를 매긴 장면도 있다. 17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우화작가인 장 드라 퐁텐(1621~1695) 의 ‘여우와 포도’를 모티프로 한 그림이 가장 눈길을 끈다. 피카소가 밑그림을 그리고, 마야가 색을 칠한 것으로 전해진다. 손을 떼지 않은 채 한 번의 선으로 그어 그린 독수리 그림도 인상적이다.
스케치북을 발견한 손녀 다이애나 위드마이어-루이즈-피카소는 가족 전용 창고에서 다른 물건을 찾다가 이 스케치북을 발견했고, 86세가 된 어머니에게 보여준 뒤 할아버지의 스케치북임을 확인했다. 영국 일간 옵저버와의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엄마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 엄마는 2차대전 중 물감과 캔버스가 공급이 부족해 연습장 등 종이에 스케치를 함께 하곤 했다”며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인 부엌에서 주로 그렸다”고 했다. 피카소 역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다.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미술학교 교사이자 피카소의 첫 미술 선생님이기도 했다. 재능 많은 아들이 13세 때 이미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자 14세에 미술대학에 입학시키며 “나는 다신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말한 뒤 아들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딸과 그린 스케치북 안에는 피카소가 물감 대신 종이 등을 붙여 만든 ‘파피에 콜레’ 기법과 평면을 해부하고 재해석한 입체파의 대표적인 기법 등이 숨어있다. 디디에 오팅어 퐁피두센터 현대미술 디렉터는 “피카소의 스케치북은 단순히 아이를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카소가 아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가 드러나는 매개”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딸 마야는 1935년 피카소가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인 마리테레스 발테름이 낳았다. 마리가 17세이던 1927년 처음 만났고, 다음 해부터 동거를 했다. 당시 피카소의 나이 46세. 1930년대 피카소 그림 속에 주로 등장하는 마리테레스는 1973년 피카소가 죽은 직후 “그와 함께 있어줘야 한다”며 자살했다.
둘 사이의 딸 마야가 3살 무렵이던 1938년 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22개월 동안 피카소는 마야의 초상화를 14점이나 남겼다.
손녀인 다이애나는 예술사가이자 큐레이터,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지난 4월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피카소미술관에서 열리는 ‘파블로 피카소의 딸, 마야 루이즈 피카소’ 전에서 공동 큐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피카소는 여러 여성을 만난 바람둥이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전시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사랑, 가족애에 관한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다이애나는 “엄마가 죽기 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기획한 전시가 열리는 중 발견된 이 스케치북은 ‘우연’이자 ‘행운’”이라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