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자고 나니 선진국'이라는 착각
윤석열 정부의 초기 행운은 역설적으로 국민 기대치가 낮은 상태로 출발한 점이다. 정치 경력이 일천한 데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같은 거창한 공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권 초 지지율이 70~80%를 넘나들던 이전 정부들과 달리, 윤 정부는 겨우 50%를 넘겼다.

6·1 지방선거를 이겼어도 거대 야당이 태산처럼 버티고 있다. 지금은 야당복(福)을 누리지만 야당 170석이 단일대오로 뭉친다면 향후 2년을 허송해야 할지도 모른다. 0.7%포인트 차 대선 패배를 ‘졌잘싸’로 여기는 진보좌파 진영에선 호시탐탐 허점을 엿본다. 언제 어디서 카운터펀치가 날아들지 모른다.

하지만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작은 법이다. 바닥에서 출발한 만큼 아직은 추락보다 반등 여지가 많다. 우선 대통령의 출근길 약식회견은 과거 불통 정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신의 한 수로 평가된다. 말실수 위험이 상존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백번 낫다. 청와대 개방, 한·미 동맹 정상화, 국가를 위한 희생자 존중 등도 착실한 득점 요인이다. 반면에 검찰 편중 인사, 장관·참모들 청문 의혹 등 까먹은 점수도 많다. 그래도 ‘검찰공화국’ 비판보다 ‘나쁜 놈은 벌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훨씬 우세하다.

국민 기대치와 무관하게 윤 정부는 출발부터 가시밭길이다. 공급망 대란, 물류 마비, 환율·유가 폭등, 주가 폭락 등 악재가 겹겹이 쌓여간다. “태풍 권역에 들어서 집에 창문이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는 대통령 말처럼, 위기 징후가 점점 짙어진다. 이를 극복할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직전 정부의 무능에 따른 반사효과도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발등의 현안도 현안이지만, 구조적·고질적 난제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지 막막하다. 노동시장을 계급화하는 노동 적폐, 세상 변화에 눈감은 부실 교육, ‘연금 고려장’ 우려를 낳는 예고된 연금 파탄, 방만·비대·비효율의 공공 적폐가 그것이다. 이런 난제들이 초저출산·고령화와 맞물려 성장잠재력을 갉아먹고 나라 미래를 어둡게 한다. 친노조 정책에다 ‘국민 눈높이’ 운운했던 문재인 정부의 부작위가 문제를 한껏 키웠다.

코로나 와중에 한동안 ‘자고 나니 선진국’이란 말이 유행했다. 유튜브에는 세계가 대한민국을 우러러본다는 ‘국뽕 영상’이 넘쳐난다. 경제 규모, 국민소득 등 수치상으론 이미 선진국이다. 코로나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미 각국과 달리, 축적된 의료시스템의 효과를 봤다. K팝과 K영화·드라마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삼성전자 등 간판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다. 1인당 소득 4만달러를 바라보면서 개도국 행세하는 것도 이젠 계면쩍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자. 막장 정치로 국민을 갈라치고, 내로남불의 진영논리가 법치 위에 군림한 게 지난 5년이다. K방역이란 자화자찬이 무색하게 막판엔 ‘속수무책이 대책’이었다. 성인 10명 중 5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고, 문맹을 퇴치했는데 문해력은 점점 떨어진다. 제조강국이라면서 초격차의 원천기술, 기초과학, 소프트 경쟁력에선 변변히 내세울 게 없다. 결국 ‘자고 나니 선진국’은 우물 안 개구리들의 착각이거나 정신승리일 뿐이다. 우리의 진짜 실력을 자각하고 인정할 때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자본(신뢰자본)이 고갈된 불신사회란 점이다. 영국 레가툼연구소의 ‘세계번영지수’에서 한국은 167개국 중 종합 29위지만 사회자본에선 147위에 그쳤다. 앙골라(146위)와 수단(148위) 사이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데 당장의 현안뿐 아니라 고질병을 누가 고치겠다고 앞장설까 싶다.

구조개혁 모범사례로 흔히 1990년대 스웨덴의 연금개혁, 2000년대 독일의 하르츠개혁(노동개혁)을 든다. 정파 이익을 초월해 부단하게 논의하고 고통을 분담한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그런 그들조차 경제위기가 닥쳤기에 가능했다는 의미에서 “운이 좋았다”고 할 정도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런 합의가 가능할까. 2년 뒤면 여야가 사활을 건 총선이 예정돼 있다.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방과 훌리건이 좌지우지하는 뺄셈의 정치구도 아래, 좌우 구분 없이 퍼주기 포퓰리즘이 뉴노멀이 됐다. 5년 단임 윤 정부가 4대 개혁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못 하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할지 모른다. 그때까진 평가를 유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