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 등
화물연대 요구 대부분 수용
품목 확대 등 갈등 불씨 남아
"화주에게만 일방적 부담 줘
문제 생길 때마다 또 깃발 들 것"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1년 본격 정치의 길로 뛰어들면서 쓴 책 《문재인의 운명》의 일부다. 2003년 화물연대 첫 총파업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 전 대통령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소속 화물연대가 지난 14일 밤 8일간의 집단 운송거부(총파업)를 중단했다. 사태 장기화로 산업현장의 피해가 커지자 궁지에 몰린 정부가 화물연대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하면서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화물연대의 즉시 현업 복귀를 전제로 △안전운임제 시행 성과에 대한 국회 보고 △컨테이너·시멘트 화물자동차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 및 적용 품목 확대 △최근 유가 상승에 따른 보조금 확대 검토 및 운송료 합리화 지원·협력 등을 약속했다.
이번 합의로 화물연대는 ‘Again(어게인) 2003’을 외치며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산업계에서는 향후 노동계의 ‘무력시위’가 줄줄이 예고된 상황에서 “이런 방식의 투쟁이 통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준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화물연대 사태의 1차적 책임은 국토부에 있다. 당초 문재인 정부 시절 국회 내 힘의 논리로 안전운임제를 도입해 놓고는, 3년 일몰시한(2022년 말)을 1년도 안 남긴 상황에서 국토부는 대선 기간 중 정권의 향배를 보느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입법 당시 약속대로 일몰 1년을 앞두고 그동안의 성과와 실태를 분석해 정책적인 대응을 잘했다면 이번 화물연대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또 있다. 이번 합의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운송거부 장기화로 산업현장 피해액이 2조원에 육박하자 정부가 부랴부랴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향후 안전운임제 연장 기간 및 적용 품목 확대 등 논의 과정을 남겨둠으로써 갈등의 불씨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국회 논의 흐름에 따라 화물연대가 언제든지 다시 깃발을 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화물연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전 품목·전 차종으로 범위를 확대할지 여부는 추가 논의와 경제 상황 등을 감안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무기력한 정부의 대응을 놓고 경영계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는 15일 화물연대의 현장 복귀에 대해 “다행이고 환영”이라면서도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과 적용 품목 확대에 대해서는 강력 반발했다. 무역협회는 “안전운임제는 화주에 대한 일방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시장 기능을 고려하지 않은 안전운임제는 기업의 국내 생산을 축소하고 국제 경쟁력을 약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노동조합이 아닌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이 관철된 것을 두고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멘트업계 관계자는 “화물연대의 운송거부는 노조에 허용된 파업(쟁의)이 아니라 부당공동행위”라며 “수시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운송거부 등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만 키운 꼴”이라고 비판했다. 중기중앙회도 “새 정부는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와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불법·부당행위에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일각에서는 이번 화물연대 사태는 준비가 안 된 정부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경제학자는 “화물연대 총파업이 뻔히 예상됐음에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물론 새 정부도 그 흔한 태스크포스(TF) 하나 꾸리지 않았다”며 “말로만 법과 원칙을 강조했을 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정부라는 방증”이라고 했다.
백승현/김익환/안대규/맹진규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