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웠다.”

수십 년을 달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뉴욕과 하와이에서도, 도쿄에서도 그는 달린다. 힘껏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사실 그 순간만큼은 무념의 시간이다. 하루키도 그랬다. 그가 땀에 젖은 채 달릴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맥주, 맥주, 맥주…’. 이 힘든 시간이 끝나고 다가올 맥주의 시간을 기다리며 그는 그저 달린다.

인간은 달리면서 덜어내고, 달리면서 또 살아난다. 그래서 마라토너들은 말한다. ‘인생에서 아픔이 필연이라면 고통은 선택’이라고. 달리는 사람들은 고통의 순간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 고통은 때로 창작의 영감으로, 생(生)의 열망으로, 일상의 에너지로 치환된다.

뛰는 자들에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러닝을 흔히 ‘몸은 가볍고 지갑은 무거운 운동’이라고 하는 이유다. 운동화 하나만 있다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갈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러너가 될 수 있다. 달리기는 쉽지만 어렵다. 오래달리기는 더 그렇다. 아무리 좋아하는 길이라도,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달린다 해도 오래 달리다 보면 “내가 뛰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아득하다. ‘뛸까, 오늘은 관둘까.’ 몇 년을 뛰어도 그때마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오르막에선 다리가 터질 것처럼 무겁다.

우리는 왜 달릴까. 인간이 달리기를 처음 한 건 200만년 전이다. 기후가 바뀌고 삼림이 초원이 되면서 조상들은 사냥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인류학자들은 달리기가 인간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선사시대 사냥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을 때 ‘달릴 수 있는 능력’을 배워 멸종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오늘도 인간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유는 ‘달리기의 기술’ 덕분이다. 생존의 문제로 달리던 인간에게 달리기는 이제 문화이자 축제다. 올림픽의 주 종목으로, 마라톤 경주로, 일상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단순하고 치열한 운동으로…. 그렇게 ‘인간 기관차들’이 탄생했다.

일상의 달리기가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달리기로 여는 아침은 매일이 기적이다. 서로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난다. 뛰다가 눈인사를 나누는 일도 많다. 나와 같은 길을 뛰는 사람들, 나와 같은 시간을 비슷하게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공감의 순간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다.

18년간 여자 마라톤 세계기록을 지킨 폴라 래드클리프는 2022년의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한다.

“달릴 때는 오로지 내 시간입니다. 쫓아와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참견하는 사람이 없어요. 오직 나 자신의 느낌과 어디로 가고자 하는 목표만이 있습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