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거부하던 X세대, 신소비 이끄는 '영포티'로 돌아왔다
공중전화와 삐삐, 시티폰, 휴대폰까지 통신 기술의 진화를 모두 경험한 세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로 표현되는 1990년대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내다 갑작스런 외환위기로 취업난을 겪어야 했던 세대. 바로 1970년대생, 대한민국 40대다.

이들이 막강한 구매력을 갖추고 소비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다. '변화가 일상'이었던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보수화하지 않고 새로운 소비를 추구하는 '영포티(Young Forty, 젊게 살고 싶어하는 40대)'로 거듭나고 있다.

17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가구주가 40대인 가구의 월 평균 소득(1인이상, 농림어가 포함)은 625만원으로 처음으로 600만원을 넘어섰다. 50대 가구 소득 587만원 보다 38만원(6.4%), 30대 가구 소득 474만원보다 151만원(31.8%) 각각 많은 수치다.

지출규모 역시 40대가 가장 많다. 40대 가구의 월 평균 지출은 466만원으로 50대(431만원)와 30대(336만원)를 훌쩍 뛰어넘는다.

전 연령대 중 가장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지금의 40대는 베이비부머나 586세대가 40대였을때보다 소비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1990년대 X세대로 불렸던 지금의 40대는 소비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며 "기성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는 특성으로 인해, 정치 성향 뿐 아니라 소비 성향도 기존 중년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게임 아이템에 100만원, 아깝지 않아"

서울 송파구에 사는 억대 연봉의 전문직 박 모(47세)씨. 그는 지난 달 모바일 게임 ‘미르4’의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100만원 이상을 결제했다. 작년에는 전투력 향상을 위해 500만원을 들여 고성능 컴퓨터로 교체했다. 박 씨는 "‘리니지 혈맹(함께 게임을 즐기는 집단)’에선 월 1000만원을 쓰는 40대 테크 기업 대표도 있다"며 "나의 만족을 위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돈을 쓰는 건 아깝지 않다"고 했다.

원래 40대는 전 연령대 중 가장 지출이 많은 세대다. 생활비와 자녀교육비로 소득의 70% 이상을 써 왔다. 하지만 1970년생, 지금의 40대가 과거의 40대와 다른 점이라면 '나의 행복을 위한 소비', 이른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분배와 공정을 중시하는 진보의 푸른 피가 흐르면서도 개인적 욕구에 충실한 세대. 모순적이지만, 이것이 바로 40대의 이야기다.

신한카드가 한국경제신문 의뢰로 3~4월 신용카드 이용자들의 소비성향을 분석한 결과 욜로 소비의 대표 항목인 가사노동 플랫폼, 필라테스·요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분야의 결제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가사노동 플랫폼 이용자 중 40대 비중이 42%로 가장 많았다. 30대(29%), 50대(15%)보다 월등히 높았다. 모바일 세탁 서비스를 정기 구독하고 있는 김 모씨(42세)는 “앱으로 주문하면 세탁물을 가져가고 가져다주니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며 "비용을 치르고 얻어낸 시간은 나를 위해 쓴다"고 했다.

스스로를 가꾸기 위한 운동을 즐기는 것도 40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필라테스·요가 학원 이용자 가운데 40대 비중은 30%로 1위다. 30대(28%)와 20대 이하(17%)보다 높다. 필라테스 개인레슨을 받고 있는 정 모(41세)씨는 "그룹레슨보다 두 배가 넘는 월 50만원 가량을 지급하더라도 개인 맞춤형 운동을 할 수 있는 일대일 레슨을 한다"며 "워킹맘으로 정신없이 살고 있는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40대는 다른 연령대보다 컨텐츠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넷플릭스 등 OTT 이용자 중 30대와 40대가 각 33%로 나란히 1위다. 30대 비중은 2019년보다 8.1%포인트 줄어든 반면 40대는 3.9%포인트 더 늘었다.

신사임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 부부장은 "40대는 가족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적극적 소비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기성세대와 다른 X세대의 등장

기득권 거부하던 X세대, 신소비 이끄는 '영포티'로 돌아왔다
이런 40대의 소비 성향은 이들의 성장기부터 만들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1990년대 10~20대였던 이들은 ‘X세대’로 불렸다. 기성세대들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미지수를 가르키는 알파벳 X가 붙었다.

X세대라는 표현은 국내에선 1993년 광고에 처음 등장했다. 배우 이병헌과 가수 김원준을 모델로 한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의 ‘트윈엑스’라는 남성 화장품 광고에서다.

‘나 X세대, 나는 거부한다. 옳지 않은 모든 것들을. 남자의 피부도 자외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남성 화장품이 흔치 않았던 당시, 이 광고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탈권위, 탈이념, 탈집단이란 반항적 DNA의 X세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이 강한 구매력과 소비성향을 가진 40대가 선택하는 제품·서비스는 '대세가 된다'는 마케팅 공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당근마켓을 필두로 한 중고거래앱 , 토스와 같은 금융플랫폼, 전기차 리스 서비스 등이 40대가 주도한 트렌드로 꼽힌다. 지난해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한국갤럽 조사)로 꼽힌 임영웅 씨도 40대 팬덤이 주축이 되어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X세대의 소비 욕구가 강한 이유

X세대가 '진보'와 '욜로'라는 이질적인 특성을 갖게 된 데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77년 1000달러에서 1994년 1만달러로 올라섰다. 1970년생들은 빈곤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례없는 경제성장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윗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시대적 과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사회적 문제보다는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개인주의가 발현한 이유 중 하나다.

1980년대 세계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X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사회악인 양담배, 사지도 피우지도 말자'는 계몽 포스터를 그렸던 이들은 1986년 '양담배 판매 전격 허용' 뉴스를 보게 됐다. 1989년엔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시행돼 대학생 사이에 유행처럼 해외 배낭여행이 번졌다.

이 같은 배경으로 X세대는 근검절약이 미덕이었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소비가 익숙했고, 변화는 일상이 됐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X세대는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며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적 성향과 왕성한 소비성향이 동시에 만들어진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로 인한 트라우마는 X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X세대가 사회에 첫 진입할 때 닥친 최악의 경제위기는 종신고용 시대의 몰락을 가져왔고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렸다.

이제 40대가 된 이들은 막강한 구매력을 갖추고 소비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성향은 X세대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며 "최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 대부분의 이목이 쏠려있지만, 실제 트렌드를 주도하는 힘은 X세대가 쥐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