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지속하기로 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서두르는 것과 대조적이다. ‘나 홀로 금융완화’ 결정으로 엔화 가치가 또다시 급락했다.

일본은행은 17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단기금리를 연 -0.1%, 장기금리를 연 0%±0.25%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연간 12조엔(약 115조3524억원)까지 상장지수펀드(ETF)를 사들여 주식시장을 지지하는 정책도 유지했다.

장기금리를 금리목표치 이내로 묶어두기 위해 10년 만기 국채를 연 0.25% 금리에 무제한 사들이는 ‘가격지정 공개시장운영’을 매일 실시한다는 방침도 명확히 했다. 금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의미다.

일부 외국계 헤지펀드는 일본은행이 금융완화 정책을 일부 수정할 것으로 예상했다. 4월 물가상승률이 2.1%까지 치솟고 지난 13일 엔화 가치가 2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코로나19 장기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경기가 침체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금융완화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경제가 주요국 가운데 코로나19 충격에서 가장 더디게 회복하는 점도 고려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다. 올 1월 전망치보다 0.9%포인트 낮췄다. EU와 중국은 각각 2.8%와 4.4%로 모두 일본을 웃돈다. 국제 원자재값 급등으로 인한 물가상승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판단도 금융정책을 유지한 배경으로 꼽힌다.

환율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점이 이번 회의에서의 유일한 변화였다. 일본은행은 발표문을 통해 “금융·외환시장의 동향이 일본 경제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외환시장에 구두개입을 한 셈이지만 엔화 가치는 일본은행의 기대와 반대로 더 떨어졌다. 이날 오전 일본은행이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달러당 엔화 가치는 134.63엔으로 1.9%(2.46엔) 하락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지난 15일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등 긴축 속도를 높이면서 일본과 금리차가 더욱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달러당 엔화 가치가 140엔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1998년 기록한 최저치인 147엔까지 엔화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