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실 리스크보다 무서운 장수 리스크…원리금 보장형 선택, 노후빈곤으로 이어질수도"
“한국의 ‘장수 리스크’는 미국보다 심각합니다. 손실 위험을 피하려고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고집하면 노후 빈곤이라는 더 큰 리스크를 지게 되죠.”

지난 14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있는 자산운용사 티로프라이스 본사. 이 회사의 마이클 데이비스 DC형 퇴직연금 부문 대표는 “미국 정부가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오래 사는 것이 리스크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운용자산 1조5500억달러(약 2000조원)의 티로프라이스는 뱅가드, 피델리티와 함께 미국의 3대 타깃데이트펀드(TDF) 운용사로 꼽힌다.

데이비스 대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 노동부 부차관보를 지낸 퇴직연금 전문가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장수 리스크’였다. 그의 말대로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심각하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1위였다. 주요 5개국(G5) 평균인 14.4%의 약 3배에 달한다. 미국(23.0%), 일본(20.0%), 영국(15.5%), 독일(9.1%), 프랑스(4.4%) 등 주요 선진국과의 격차도 크다.

데이비스 대표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은 당장은 손실이 나지 않아 담당자들이 편할 수 있지만 은퇴자들의 삶은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오히려 소송 위험에 휩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는 노후 자금 마련은커녕 물가상승률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 차원에서도 근로자의 은퇴 자산을 책임지고 불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연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하면 기업이 근로자의 장수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와이엇 리 티로프라이스 타깃데이트전략부문 대표는 “기업 입장에서는 근로자들이 충분한 노후 자금을 모으지 못해 퇴직을 미룰 경우 인사 적체로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며 “기업들이 보다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는 투자 상품을 디폴트옵션으로 선택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5일 만난 애런 사피로 모닝스타 은퇴 및 공공정책부문 대표도 “퇴직연금을 통한 주식 투자로 발생할 수 있는 ‘손실 리스크’보다 더 큰 것이 ‘장수 리스크’”라며 “장수는 각종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이는 개인의 재정 쇼크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식시장에 투자한다면 성공할 가능성도 있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며 “하지만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투자한다면 당신은 100% 확률로 노후 자금 마련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워싱턴·볼티모어=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