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투자자는 장기투자자다. 원금보장형 상품에 장기 투자하면 충분한 노후 자금을 모을 수 없다.’

미국 노동부가 기업들에 퇴직연금 상품의 기본 옵션(QDIA·적격디폴트옵션 상품)을 제시하는 규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문구에는 미국 정부가 2006년 퇴직연금의 자동가입제도와 디폴트옵션제도를 도입한 기본 철학이 담겨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근로자들이 주식 등 위험자산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볼 위험보다 충분한 노후 자금 없이 은퇴하는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퇴직연금 전액 주식투자 가능한 美…급락장서도 '연금런'은 없다

‘노후 보장’엔 역부족인 예·적금

2000년대 들어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평균 수명 증가로 발생하는 재정 부담을 해결해야 했다. 더 많은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가입률은 저조했다. 절차가 번거롭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나서 직장 퇴직연금 자동가입제도 도입을 장려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자동가입제도 도입을 주저했다. 자동가입이 가능하려면 회사가 미리 정해 놓은 디폴트옵션 상품이 필요했다. 수익률은 좋지만 위험도 큰 주식형펀드를 디폴트옵션으로 제시했다가 손실이 나면 근로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기업 퇴직연금 담당자 입장에선 자동가입제도를 도입하지 않거나, ‘소송에서 안전한’ 예·적금 등 원금보장형 상품을 기본 옵션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책 《넛지》의 저자로 유명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의 이런 관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안전한 투자를 하라고 넛지를 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투자를 하라고 넛지를 가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옆구리를 쿡 찌른다’는 뜻의 넛지는 강압이 아니라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끄는 장치를 말한다.

정부가 자산배분펀드 투자 장려

원금보장 상품으로는 근로자들이 충분한 노후 자금을 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넛지를 가하기로 했다. 2006년 자동가입제도 등을 골자로 한 연금보호법(PPA)을 제정하고, 미국 노동부가 기업들이 기본 옵션으로 정할 수 있는 상품군을 제시했다.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펀드 △투자일임계좌 △원금보장펀드 등이 포함됐다.

정부는 기업이 그 안에서 디폴트옵션 상품을 선정했을 때 원금 손실에 대한 면책 조항을 주기로 했다. 원금보장형 상품은 120일 이내 기간에 제한적으로만 활용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면책 조항이 도입되면서 기업 퇴직연금 담당자들의 관심이 ‘소송에 걸리지 않는 것’에서 ‘근로자 노후 자산 마련’으로 이동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TDF 시장

이후 미국에서는 TDF 전성시대가 열렸다. 미국 자산운용사 뱅가드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가입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고객사의 98%가 TDF를 디폴트 상품으로 선택했다. TDF란 생애주기에 따라 주식과 채권 비중을 조정하는 상품이다. 연령대가 낮을 때는 주식 등 위험 자산 비중을 높게 가져가고, 퇴직 시점이 다가올수록 채권 등 안전자산 편입 비중을 높이는 리밸런싱 구조를 갖추고 있다.

최근 TDF들은 더 공격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를 겨냥한 TDF들은 앞다퉈 주식 비중을 늘리고 있다. 티로프라이스는 최근 은퇴 시점이 30년 이상 남은 TDF에 대해 주식 비중을 98%까지 높였다. 미국은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와이엇 리 티로프라이스 타깃데이트전략부문 대표는 “은퇴까지 30~40년이 남은 20대 근로자 입장에서 단기적인 주식시장의 변동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장기적으로 주식에 투자하면 복리효과를 통해 수익이 눈덩이처럼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연금 투자만으로 백만장자가 된 근로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피델리티에 따르면 자사 고객 기준 401k 연금 자산 규모가 100만달러를 넘는 ‘연금 백만장자’ 수는 지난해 말 기준 44만2000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최근 증시가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미국 근로자들은 오히려 기존보다 더 많은 금액을 퇴직연금에 투자하고 있다. 피델리티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미국인들은 월급의 평균 14%를 퇴직연금 분담금으로 쌓았다. 피델리티가 집계를 시작한 후 가장 높은 비중이다.

워싱턴·볼티모어=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