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석 → 245석’

지난 19일 프랑스 하원 결선투표 결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범여권의 의석 수는 5년 전과 비교해 100석 넘게 줄었습니다. 프랑스 하원 의석 수는 전체 577석으로 과반을 넘기려면 289석이 필요한데요. 과반에 44석이 모자란 겁니다.

이에 반해 지난 4월 마크롱 대통령과 대선 결선투표에서 맞붙었던 마린 르펜 대표가 이끄는 극우파 정당인 국민연합(RN)은 89석으로 지난 총선과 비교해 의석이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지난 총선 당시 17석에 불과했던 극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 뤽 멜랑숑 대표는 한 때 중도우파 공화당과 양강구도를 형성하던 사회당 등을 포섭해 범좌파 연합인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을 구성했고, 무려 133석을 차지하며 제1 야당으로 우뚝 섰습니다. 프랑스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20년 만입니다.

러, 佛 총선 코앞에 두고 유럽행 가스 공급 감축


프랑스 총선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선 최근 러시아의 대(對) 유럽 행보를 먼저 봐야 합니다. 최근 러시아는 유럽연합(EU)의 대러 경제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등에 대한 보복 조치로 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감축했습니다. 러시아는 자국산 가스 최대 수입국인 독일에 대해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을 통해 수송하는 천연가스 물량은 60% 가량 감축했습니다. 지난 15일부터는 프랑스에 대한 가스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고, 17일부터는 이탈리아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러시아는 가스 공급 감축이 '경제 보복' 조치라는 서방 국가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은 이같은 조치에 대해서 “서방 국가들의 대러 제재 때문에 고장난 가스관의 부품이 도착하지 않아서”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21일부터 오는 28일까지 흑해 해저를 통과하는 '터키 스트림' 가스관도 연례 안전점검을 이유로 가동 중단한 상황입니다.

러시아가 휘두르는 '에너지 무기'는 유럽 각국 지도자들에 직격타가 되는 모습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280억달러(약 36조원) 규모의 저소득층 및 기업 지원책, 가스·전기료 상한제 도입, 휘발유 가격 일부를 환급해주는 방안 등을 내놨지만 총선에서 참패했습니다. 독일은 오는 10월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를 시작으로 주·연방 단위 선거가 줄지어 예정돼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이탈리아 역시 내년 6월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치 지형 완전히 뒤바뀌어

에너지를 무기화(化)한 푸틴의 공격에 첫번째 타깃이 된 마크롱의 타격은 유독 큽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해 대통령제를 택한 어느 나라든 여대야소일 때 대통령의 국정에 힘이 실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프랑스가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어서입니다. 국회의 비준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통령이 자신과 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영국과 일본 등 의원내각제 국가처럼 과반을 차지한 의회 1당의 당수가 총리를 맡습니다. 대통령과 총리의 소속정당이 다른 '동거정부'가 탄생할 가능성도 큽니다. 실제로 1997년 총선에선 야당이었던 사회당이 승리하며, 대통령은 우파인 자크 시라크, 총리는 직전 대선에서 시라크 대통령과 맞붙었던 사회당 당수 리오넬 조스팽이 맡는 동거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당초 대통령 임기가 7년에 달했던 프랑스는 2000년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여 통과됐습니다. 그리고 2002년부터 대선과 총선의 주기를 맞춰 실시하게 됩니다. 대선으로부터 약 두 달 뒤 총선이 치러지다보니, 대선에서 이긴 정당, 즉 여당이 총선에서도 승리하는 패턴이 반복돼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여권이 하원 의석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1997~2002년 이후 20년만에 여소야대 국면이 탄생한 겁니다.

특히 이번 프랑스 총선에선 명맥은 유지하던 전통적인 좌우 정당 간 양강 구도도 완전히 끝납니다. 프랑스는 1958년 제5공화국 출범 후 초대 대통령인 샤를 드골이 창설한 신공화국연합을 계승하는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당(LR), 드골의 맞수이자 1981년부터 14년 간 대통령에 재임한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끌던 사회당의 양강 구도가 오랜 시간 지속돼왔습니다.


하지만 2017년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정당 앙마르슈(EM·현 르네상스)가 대선에 이어 총선에서도 과반을 차지하며 공화당과 사회당 모두 몰락한데 이어, 대선 결선투표에도 두 차례 모두 극우파 르펜 RN 대표가 오르며 정치 지형 자체가 뒤바뀝니다. 여당의 참패로 캐스팅보트를 쥔 공화당은 체면치레는 했지만 사회당의 경우, 자체적으로 정당 연합도 구성하지 못한 채 극좌파 멜랑숑 LFI 대표의 주도하는 범좌파연합에 참여하며 좌파의 주도권까지 완전히 잃게 됩니다.

원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죠. 프랑스에선 극좌파와 극우파가 통하는 지점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번 프랑스 총선에서 제일 주목할만한 점은 두 정당 모두 친러 성향입니다. 르펜 같은 경우엔 RN 운영 과정에서 러시아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로 끈끈한데,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계속해서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조치를 해제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멜랑숑도 “푸틴을 궁지에 몰면 안 된다”며 러시아를 계속해서 두둔해왔습니다. 극좌와 극우 모두 프랑스에서 정치 이념을 가르는 핵심 기준 중 하나인 유럽연합(EU)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도 부정적입니다. 프랑스 역사상 극좌파와 극우파가 의석을 이렇게 많이 차지한 건 처음입니다. 현재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기 때문에 만약에 마크롱 대통령이 공화당과 연정을 구성하는데 실패하면 엄청난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푸틴이 가스 밸브를 잠그며 마크롱의 정치생명까지 잠가버린 상황입니다.

끝도 없이 치솟는 세계 곡물, 에너지 가격

유럽 각국은 에너지와 곡물가격 급등에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이렇게 공급을 대폭 줄여버리면서 현재 에너지가격 급등에 대응한 한시적 재정 지출이 전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1%를 넘어섰고, 이탈리아는 2%, 그리스는 3%를 넘어선 상황입니다.

눈앞에 다가운 에너지 대란에 유럽 각국은 탈(脫)탄소 기조를 버리고 석탄 발전을 늘리고 있습니다. 독일은 현재 사회민주당의 슐츠 총리가 집권을 하고 있는데 사민당의 당론이었던 탈석탄, 2030년까지 석탄 발전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뒤집어 엎고 유휴 석탄화력발전소를 재가동하고, 천연가스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서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부 장관은 지난 19일 "씁쓸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가스 소비를 줄일 필요가 있다"며 "석탄 사용을 늘리는 건 가스 시장 상황이 악화한 데 따른 일시적 조치"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푸틴의 전략은 우리를 동요시키고, (에너지) 가격을 올리려는 것이 분명하다"면서 "우리는 단호하고, 정확하고, 사려 깊게 우리 자신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날 발표된긴급조치들은 오는 2024년 3월 31일까지 시행되고, 몇 주 내에 시행에 필요한 법률이 제정될 예정입니다. 독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도 2020년 초에 완전히 폐쇄했던 석탄화력발전소 재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올해 에너지대란이 더욱 심각할거라 예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 서유럽 일대가 폭염으로 몸살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남부는 6월 둘째주부터 43도를 넘어섰고, 프랑스까지 40도 행렬에 일찌감치 동참한 상황입니다. 독일에선 폭염이 지속되니깐 큰 산불이 연이어 났습니다.

곡물 가격 상승세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세계 최대의 밀 생산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전쟁 발발 직후부터 가격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 항구를 봉쇄하면서 상황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항구 봉쇄로 곡물 선적이 안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2000만톤 이상의 밀이 사일로(저장고)에 방치돼있는 상태입니다. EU 같은 경우엔 제재를 풀어서 러시아가 식품, 비료 이런거 수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가로 우크라이나 해상 봉쇄를 해제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러시아가 이걸 받아들일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 주도의 강도 높은 대러 금융제재가 처음 시작됐을 때와 달리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는 끊임없이 오르고 있습니다. 22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외환시장에서 루블화는 달러당 54루블에 마감했습니다. 연일 7년 중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에만 해도 스위프트망에서 퇴출되고 금융 제재 강하게 받았었습니다. 러시아는 바로 석유하고 천연가스를 루블화로 지급하도록 하고 기준금리를 9.5%에서 20%로 올려버렸고,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며 루블화 통화 가치를 밀어 올렸습니다.
지난 15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환전소 시세판 앞으로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5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환전소 시세판 앞으로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국제 정세에서 공세에 몰리던 러시아는 최근 자신감이 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서방 국가들의 단일대오가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며 러시아와 달리 선거 때문에 민심에 민감한 각국 정상들은 국내 인플레이션을 신경쓰기도 바빠진 상황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상대의 약점으로 잡은 푸틴, 과연 언제까지 국제 정세와 글로벌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지 우려됩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