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가면 뒤에 숨은 인간군상의 실체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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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명작 유레카
제임스 엔소르의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벨기에 국민화가 제임스 엔소르
위선의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남겨
교활하고 야비한 인간군상 속에
진짜 얼굴 가진 참된 존재는 나뿐
가면 그림 많이 남긴 '가면의 화가'
사회에 적응 못한 저항정신 담아
제임스 엔소르의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벨기에 국민화가 제임스 엔소르
위선의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남겨
교활하고 야비한 인간군상 속에
진짜 얼굴 가진 참된 존재는 나뿐
가면 그림 많이 남긴 '가면의 화가'
사회에 적응 못한 저항정신 담아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에서 유래한 용어로, 분석심리학에서는 외적 인격을 가리킨다.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를 이렇게 정의했다.
“많은 사람이 페르소나에 지배된 생활과 심리적 욕구들을 채우는 이중생활을 한다. 그 이상의 가면을 쓰는 사람도 많다. 직장에서 쓰는 것과 다른 가면을 가정에서 쓸지도 모른다. 골프장에서, 친구와 포커를 할 때도 제3의 가면을 쓸 수 있다. 그 모든 가면을 총괄한 개념이 그의 페르소나다.”
이 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다양한 상황이나 요구된 역할에 따라 적합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벨기에의 국민화가 제임스 엔소르(1860~1949)는 세계미술사에서 최초로 위선과 거짓의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실체를 폭로한 자화상을 남겼다.
형태와 색상이 각기 다른 가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 중앙의 붉은색 옷을 입고 꽃과 깃털로 장식된 붉은색 모자를 쓴 남자만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예리한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남자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엔소르다. 다양한 형태의 가면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치장을 했는데도 섬뜩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것 같고, 사악한 음모를 꾸미거나 공격하려는 듯 위협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엔소르가 기괴한 가면들에 포위당한 자화상을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의 야비한 본성을 가면들을 통해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즉 교활하고, 비열하고, 우둔하고, 중상모략하는 인간군상(人間群像)을 가면들에 비유해 풍자한 것이다. 그는 가면을 쓰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해 오직 자신만이 진짜 얼굴을 가진 참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다. 엔소르는 ‘가면의 화가’로 불릴 만큼 가면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면을 그림에 사용하게 된 배경으로는 가정환경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저항 정신을 꼽을 수 있다.
엔소르는 1860년 벨기에 북해 연안에 있는 오스텐드에서 태어났다. 한적한 항구 마을인 오스텐드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여름철에는 벨기에 왕실이나 유럽 상류층이 즐겨 찾는 해변 휴양지의 명소로, 다른 하나는 벨기에의 명물이자 관광자원인 오스텐드 전통축제였다.
엔소르는 축제의 흥분 속에서 변장 가면을 쓴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다니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광경을 보고 자랐다. 어릴 적 그는 친구들과 함께 변장 가면을 쓰고 축제를 열광적으로 즐기곤 했기 때문에 가면에 친숙했다.
게다가 엔소르의 가족은 축제용품과 해변 장신구를 파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엔소르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거들면서 다양한 가면을 접했다. 가게 4층의 낡고 비좁은 다락방을 작업실로 개조해 가면, 카니발 의상, 골동품 등으로 실내를 꾸미고 이런 소품들을 그림에 담았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을 감추는 동시에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중성과 변신에 대한 욕구 충족, 권위를 조롱하는 수단인 가면의 특성에 매료됐다. 그는 가면을 개인의 성격과 행동적 특성, 과장, 왜곡 등 인상학적 탐구 및 예술적 표현기법을 실험하는 창작의 새로운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나 풍자와 과장, 음울한 정서가 반영된 엔소르의 가면 그림은 미술계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수적인 벨기에 미술계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파헤치는 대담한 주제와 혁신적인 표현방식이 결합된 엔소르의 독창적 화풍을 비판했다. 대중은 추한 그림이라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당시 엔소르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가 1895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말수가 적고 완고한 오스텐드 주민들은 내 그림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적의에 찬 대중, 그들은 예술을 싫어한다.”
당연히 그림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이 자화상을 그릴 때 엔소르는 39세였는데도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신세였다. 가족에게 의존해 창작 활동을 지속해야만 했던 비참한 상황과 사회에서 낙오된 패배자라는 피해의식이 예술가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자화상 속 가면들은 엔소르를 조롱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술가의 분노와 모멸감을, 그의 맨얼굴은 가난과 고독, 편견에도 굴복하지 않은 예술혼을 의미한다.
운명의 여신은 엔소르에게 뒤늦게 영광을 안겨줬다. 그는 1929년 69세에 벨기에 알베르 국왕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31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고향 오스텐드에 세워졌다. 1933년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49년 11월 19일 엔소르가 별세했을 때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거행됐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많은 사람이 페르소나에 지배된 생활과 심리적 욕구들을 채우는 이중생활을 한다. 그 이상의 가면을 쓰는 사람도 많다. 직장에서 쓰는 것과 다른 가면을 가정에서 쓸지도 모른다. 골프장에서, 친구와 포커를 할 때도 제3의 가면을 쓸 수 있다. 그 모든 가면을 총괄한 개념이 그의 페르소나다.”
이 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다양한 상황이나 요구된 역할에 따라 적합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벨기에의 국민화가 제임스 엔소르(1860~1949)는 세계미술사에서 최초로 위선과 거짓의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실체를 폭로한 자화상을 남겼다.
형태와 색상이 각기 다른 가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 중앙의 붉은색 옷을 입고 꽃과 깃털로 장식된 붉은색 모자를 쓴 남자만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예리한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남자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엔소르다. 다양한 형태의 가면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치장을 했는데도 섬뜩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것 같고, 사악한 음모를 꾸미거나 공격하려는 듯 위협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엔소르가 기괴한 가면들에 포위당한 자화상을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 인간의 야비한 본성을 가면들을 통해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즉 교활하고, 비열하고, 우둔하고, 중상모략하는 인간군상(人間群像)을 가면들에 비유해 풍자한 것이다. 그는 가면을 쓰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해 오직 자신만이 진짜 얼굴을 가진 참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다. 엔소르는 ‘가면의 화가’로 불릴 만큼 가면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면을 그림에 사용하게 된 배경으로는 가정환경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저항 정신을 꼽을 수 있다.
엔소르는 1860년 벨기에 북해 연안에 있는 오스텐드에서 태어났다. 한적한 항구 마을인 오스텐드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여름철에는 벨기에 왕실이나 유럽 상류층이 즐겨 찾는 해변 휴양지의 명소로, 다른 하나는 벨기에의 명물이자 관광자원인 오스텐드 전통축제였다.
엔소르는 축제의 흥분 속에서 변장 가면을 쓴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다니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광경을 보고 자랐다. 어릴 적 그는 친구들과 함께 변장 가면을 쓰고 축제를 열광적으로 즐기곤 했기 때문에 가면에 친숙했다.
게다가 엔소르의 가족은 축제용품과 해변 장신구를 파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엔소르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거들면서 다양한 가면을 접했다. 가게 4층의 낡고 비좁은 다락방을 작업실로 개조해 가면, 카니발 의상, 골동품 등으로 실내를 꾸미고 이런 소품들을 그림에 담았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을 감추는 동시에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중성과 변신에 대한 욕구 충족, 권위를 조롱하는 수단인 가면의 특성에 매료됐다. 그는 가면을 개인의 성격과 행동적 특성, 과장, 왜곡 등 인상학적 탐구 및 예술적 표현기법을 실험하는 창작의 새로운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나 풍자와 과장, 음울한 정서가 반영된 엔소르의 가면 그림은 미술계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수적인 벨기에 미술계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파헤치는 대담한 주제와 혁신적인 표현방식이 결합된 엔소르의 독창적 화풍을 비판했다. 대중은 추한 그림이라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당시 엔소르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가 1895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말수가 적고 완고한 오스텐드 주민들은 내 그림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적의에 찬 대중, 그들은 예술을 싫어한다.”
당연히 그림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이 자화상을 그릴 때 엔소르는 39세였는데도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신세였다. 가족에게 의존해 창작 활동을 지속해야만 했던 비참한 상황과 사회에서 낙오된 패배자라는 피해의식이 예술가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자화상 속 가면들은 엔소르를 조롱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술가의 분노와 모멸감을, 그의 맨얼굴은 가난과 고독, 편견에도 굴복하지 않은 예술혼을 의미한다.
운명의 여신은 엔소르에게 뒤늦게 영광을 안겨줬다. 그는 1929년 69세에 벨기에 알베르 국왕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31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고향 오스텐드에 세워졌다. 1933년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49년 11월 19일 엔소르가 별세했을 때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거행됐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