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아무도 사랑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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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故 황병기 선생
"감정 없애야 좋은 음악 나와"
최고의 시와 건축물은
'있을 것만 남겨진 것'아닐까
정치인을 사랑하지 마라
어리석은 악행이 될지니
이응준 시인·소설가
"감정 없애야 좋은 음악 나와"
최고의 시와 건축물은
'있을 것만 남겨진 것'아닐까
정치인을 사랑하지 마라
어리석은 악행이 될지니
이응준 시인·소설가
내 일지(日誌)에는 ‘2003년 5월 16일 금요일 저녁’으로 적혀 있다. 독대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에게 질문했다. “좋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상하기 힘든 답이 왔다. “감정(感情)을 제거해야죠.” 당황한 나는 반문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설명 따윈 불필요하다는 투로 명인은 다시 대답했다. “조용필 씨를 만났는데, 그분도 이점에 관해 나와 똑같은 생각이더군요.” 명인은 정말로 아무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2018년 1월 31일, 명인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조상이다. 다음은 이슬람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아브라함 일가는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살고 있었다. ‘우상숭배’가 기승인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부친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게 직업이었다. 아브라함이 물었다. “아버지, 저 우상들이 살아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브라함은 인간들이 우상을 모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마을에서 제일 큰 우상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우상들을 전부 부숴버렸다. 사람들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냐며 난리가 났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기 제일 큰 우상이 일어나더니 다른 우상들을 전부 파괴했소.” 사람들은 말이 되냐며 더욱 분노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되물었다. “그런 일도 못하는 우상을 왜 믿는 거요?”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아브라함은 아내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도망쳤다.
1882년 7월 19일, 임오군란이 터졌다. 반란군에 빈민들이 합류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아수라장 속에서 괴이한 광경이 나타나는데, ‘무당’들이 우두국(牛痘局)들을 공격하고 불 지른 것이 그것이다. 당시 지석영이 보급한 종두법은 천연두 예방에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무당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인 ‘마마귀신’을 빼앗아간 ‘신문명’을 증오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8년 만에 재집권했다.
주로 변호사들이 정치평론을 일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인들이 죄다 범죄자라 변호가 필요해 그런가? 이미 한국 정치는 정신병리학의 영역으로 이동했으니 정신과 의사들이 정치평론을 해야 옳거니와, 정치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개’들이 너무 많아 동물학자들도 썩 어울린다. 정작 궁금한 건 이것이다. ‘그 개들은 그 호랑이들을 어디서 구해온 것일까?’ 나는 정답을 안다. ‘특정 정치인을 우상 숭배하는 어떤 대중’이다.
정치 참여가 ‘정치 테러’로 흑화된 지 오래다. 조지 오웰은 진영논리를 불의(不義)로 여기며 자신의 글쓰기 목적을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했다. 자유민주시민은 성악설이 철학적 토대다. 사회구조 이전에 인간 본성 차원에서 먼저 성찰해야 민주 제도는 문제가 생겼을 적마다 수리와 개선이 가능하고 파시즘은 씨 뿌려질 곳을 잃는다. 인간은 ‘우상 숭배하는 동물’이다. 저건 돌덩이일 뿐이라고 누군가 진실을 말하면 우르르 몰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종(種)이다. ‘자유’는 힘겹다. 적당한 조건만 허락되면 노예만큼 세상 편한 실존이 없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하는 편은 그나마 가엽다. ‘마마귀신 장사’를 계속하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 세력이 창궐해 있다. 이념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돈벌이와 권력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인생은 짧고 허무하기에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작음 속에서 행복하고 타인을 위로할 수도 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깃든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거부할 수 있다. 정의로운 지지자라는 탈을 쓴, 우상의 ‘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안타 칠 마음을 비우고 타석에 들어서면 홈런이 나온다. 가야금 명인과의 그 저녁 이후 열아홉 해가 지난 지금 나는 시를 쓸 적에 감정을 제거해야 좋은 시, 감동하는 시가 나온다는 이 ‘역설적 진리’를 안다. 시란 무엇인가. ‘있을 것만 있는 것’이 시다. 건축물도 그렇다. ‘가장 튼튼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아닐 거 같은데 막상 만들어놓고 보면 그렇다.’ 감정을 제거하고 정치인을 대하는 사람이 많은 민주공화국은 튼튼하고도 아름다울 것이다. 정치인을 사랑하지 마라. 어리석은 악행이 될 공산이 크고, 무엇보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학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조상이다. 다음은 이슬람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아브라함 일가는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살고 있었다. ‘우상숭배’가 기승인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부친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게 직업이었다. 아브라함이 물었다. “아버지, 저 우상들이 살아 있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브라함은 인간들이 우상을 모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마을에서 제일 큰 우상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우상들을 전부 부숴버렸다. 사람들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냐며 난리가 났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기 제일 큰 우상이 일어나더니 다른 우상들을 전부 파괴했소.” 사람들은 말이 되냐며 더욱 분노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되물었다. “그런 일도 못하는 우상을 왜 믿는 거요?”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아브라함은 아내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도망쳤다.
1882년 7월 19일, 임오군란이 터졌다. 반란군에 빈민들이 합류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아수라장 속에서 괴이한 광경이 나타나는데, ‘무당’들이 우두국(牛痘局)들을 공격하고 불 지른 것이 그것이다. 당시 지석영이 보급한 종두법은 천연두 예방에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무당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인 ‘마마귀신’을 빼앗아간 ‘신문명’을 증오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8년 만에 재집권했다.
주로 변호사들이 정치평론을 일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인들이 죄다 범죄자라 변호가 필요해 그런가? 이미 한국 정치는 정신병리학의 영역으로 이동했으니 정신과 의사들이 정치평론을 해야 옳거니와, 정치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개’들이 너무 많아 동물학자들도 썩 어울린다. 정작 궁금한 건 이것이다. ‘그 개들은 그 호랑이들을 어디서 구해온 것일까?’ 나는 정답을 안다. ‘특정 정치인을 우상 숭배하는 어떤 대중’이다.
정치 참여가 ‘정치 테러’로 흑화된 지 오래다. 조지 오웰은 진영논리를 불의(不義)로 여기며 자신의 글쓰기 목적을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했다. 자유민주시민은 성악설이 철학적 토대다. 사회구조 이전에 인간 본성 차원에서 먼저 성찰해야 민주 제도는 문제가 생겼을 적마다 수리와 개선이 가능하고 파시즘은 씨 뿌려질 곳을 잃는다. 인간은 ‘우상 숭배하는 동물’이다. 저건 돌덩이일 뿐이라고 누군가 진실을 말하면 우르르 몰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종(種)이다. ‘자유’는 힘겹다. 적당한 조건만 허락되면 노예만큼 세상 편한 실존이 없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고 말하는 편은 그나마 가엽다. ‘마마귀신 장사’를 계속하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 세력이 창궐해 있다. 이념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돈벌이와 권력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인생은 짧고 허무하기에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작음 속에서 행복하고 타인을 위로할 수도 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깃든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거부할 수 있다. 정의로운 지지자라는 탈을 쓴, 우상의 ‘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안타 칠 마음을 비우고 타석에 들어서면 홈런이 나온다. 가야금 명인과의 그 저녁 이후 열아홉 해가 지난 지금 나는 시를 쓸 적에 감정을 제거해야 좋은 시, 감동하는 시가 나온다는 이 ‘역설적 진리’를 안다. 시란 무엇인가. ‘있을 것만 있는 것’이 시다. 건축물도 그렇다. ‘가장 튼튼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아닐 거 같은데 막상 만들어놓고 보면 그렇다.’ 감정을 제거하고 정치인을 대하는 사람이 많은 민주공화국은 튼튼하고도 아름다울 것이다. 정치인을 사랑하지 마라. 어리석은 악행이 될 공산이 크고, 무엇보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학대’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