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역병(疫病)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기침을 하면서 피가래를 토했고, 밤이 되면 열이 나면서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식은 땀도 흘렸다. 게다가 밥을 잘 먹지를 못하고 기력도 점차 쇠약해져 갔다. 한 두명에게서 시작한 비슷한 증상은 점차 가족 단위로 번져갔다.

마을의 의원은 사람들이 증상이 비슷한 것을 보고서 역병을 의심했다. 의원은 진찰을 할 때면 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석웅황 가루를 꺼내서 적신 솜에 묻혀 자신의 코 안에 집어 넣고, 여러 겹의 천으로 코와 입을 감싸 매고 진찰을 했다. 진찰을 마친 후에는 종이 심지로 본인의 콧구멍을 찔러 재채기가 나도록 했다. 의원은 당시 의서에 적힌 대로 나름대로 스스로의 방어책을 강구하고서 진찰에 나선 것이다. 의원 자신도 역병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찰을 마친 의원은 “마을 사람들의 병은 노채병(勞瘵病)입니다. 노채병은 역병의 일종으로 노채충(勞瘵蟲)이 폐장에 침입해서 생긴 병입니다. 죽은 이는 어서 화장을 하고 그 방은 들어가지 말며 명이 붙어 있는 병자는 다른 방에 머물게 한 후 접촉을 삼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노채병이란 요즘의 결핵을 말한다.

의원은 이어서 “의서에 보면 노채병을 치료한다는 처방들이 있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습니다. 경옥고(瓊玉膏)가 도움이 된다고 나와 있지만, 노채충을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보음(補陰)을 시켜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도와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병자와의 접촉을 피하면서 병자나 건강한 자 모두 잘 먹게 해서 보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당부했다.

마을의 민심은 점차 흉흉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침을 하는 사람은 무슨 귀신을 본 것처럼 피했다. 게다가 집안에 한 명의 환자만 있어도 그 가족 모두 죄인처럼 지내야 했다. 역병이 돌기 시작해 수개월이 지나면서 죽는 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역병으로 인한 망자(亡者)는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 버려졌고, 심지어 망자와 함께 통째로 집을 불태우기도 하고 아직 멀쩡한 가족은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서 멀리 이사를 떠나기도 했다. 벌써 마을 사람 중 십분지일이 노채병으로 병사했다.

마을 변두리에는 두 부모와 과년한 딸이 사는 한 가족이 있었다. 그 처자는 혼기가 차서 평소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유일하게 하는 일은 새벽에 마을의 우물물을 길러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처자에게도 노채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마을의 여러사람이 접촉한 두레박 손잡이를 통한 감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모는 부랴부랴 딸을 마당 한 켠에 있는 작은 사랑채에 머물게 했다. 부모는 딸 아이를 애지중지 했지만, 자신들도 자칫 역병에 걸릴까 두려워 하루 세끼 밥을 전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딸은 기침과 가래, 객혈을 보이면서 식사량이 점차 줄더니 몸이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문밖에 있는 밥이 전해준 그대로 말라 있었다. 그날 밤 부모는 밖에서 딸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순이야~~ 순이야~” 잠시 적막이 감돌았고, 부모는 이내 통곡을 하며 울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서 딸아이와 함께 사랑채를 불사르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직접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을 했다. 부모는 ‘딸이 역병으로 죽은 것도 원통한데, 어떻게 뜨거운 화염에 휩싸이게 해서 두 번을 죽게 할 수 있느냐’며 울부짖었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모는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채를 불살랐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주검이 된 처자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꽃다운 순이가 시집도 못 가고 처녀귀신이 되겠구나” “불쌍하지만 어쩌겠소~”라고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랑채가 활활 타서 재가 된 후에야 하나둘씩 흩어졌다. 그러나 사실 딸의 주검은 사랑채 안에 없었다.

전날 밤, 부모는 딸이 죽은 줄 알고 관에 넣으려고 했다. 딸 아이의 팔다리를 잡아 들어 올리는 순간, 바로 그때 “어머니~ 아버지~” 부모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딸의 입에서 새어 나온 가는 숨 속에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시 딸은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순이야~ 아마도 너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내일 불살라야 할 것이다. 네가 숨이 붙어 있다손 치더라도 살릴 방도가 없구나.” 부모는 펑펑 울면서 아직도 숨이 붙어 있을 딸아이를 관에 넣은 후 야밤을 틈타 수레에 실어 강물에 흘려보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을의 역병은 잠잠해졌고, 마을은 평온을 되찾고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마을에 큰 소란이 벌어졌다. “귀신이 나타났다. 죽었던 순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사실은 귀신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순이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순이의 부모는 순이를 보자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흐느꼈다. 순이는 부모님을 이해한다며 안심을 시켰다. 그러면서 “이분이 저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옵니다.”라고 했다. 순이는 혼자가 아니라 어떤 남자와 함께 고향을 찾은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부모는 의원을 불러 순이를 진찰케 했다. “이 처자는 현재 무척 건강하오.” 그런데 의원은 자초지종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이런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노채병으로부터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는지 자신도 무척 궁금했다.

의원이 남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간병을 한 것이요?” 남자는 당시 상황을 되짚어 떠올렸다. “저는 금산(金山)에 사는데, 홀로 강에서 장어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그날도 장어를 잡고 있는데, 강을 떠내려오는 관을 발견하고 열어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관 속에는 피골이 상접한 젊은 처자가 누워있었는데, 분명 숨이 붙어 있는 것이었죠. 저는 그 처자를 업어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어부인지라 장어와 물고기만은 무척 많아서 이 처자에게 생강, 마늘, 대파 등 갖은 채소를 넣어서 정성스럽게 고아서 날이면 날마다 먹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되니 처자가 이처럼 건강해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서에 보면 장어를 만려어(鰻鱺魚)라고 해서 충(蟲)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고, 기운을 나게 하면서 노채병에도 좋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오만, 장어 자체가 노채병을 치료한 것은 아닐 것이요. 아마도 장어와 다양한 물고기를 꾸준하게 섭취함으로써 처자의 기력을 회복시킨 결과로 생각되오. 무엇보다 영양보충을 잘한 결과요. 또한 그대의 정성에 하늘도 감복해서 처자가 스스로 역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소. 다행이구려.”라고 했다.

그때 어부가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님, 처자가 역병으로 인해 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들 하는데, 그럼 저는 왜 역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까?”하고 말이다. 의원은 “모든 역병이 병자와 접촉이 되었다고 해서 걸리는 것은 아니네. 의서에 보면 몸 안에 정기(正氣)가 충만하면 사기가 침범하지 않는다고 했네. 또한 미병치병(未病治病)이라고 해서 아직 병들지 않는 미병(未病) 또한 병으로 보고 미리미리 예방하라고 했네. 이미 병이 나고 난 후라면 이미 늦은 것이지. 아마도 자네는 평소 정기가 강했을 것이고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었던 것 같네.”라고 답했다. 정기(正氣)란 요즘의 면역력을 의미한다.

어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원에게 “그렇군요. 평소에 정기를 키우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처자의 건강도 회복되었고,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저는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야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순이가 어부의 팔목을 잡았다. “어부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저를 살려 주셨으니, 이제 제가 평생 은혜를 갚도록 해 주세요.” 순이가 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꺼낸 말은 청혼이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모의 눈빛도 간절했다.

순이와 어부는 바로 그 자리에서 혼례를 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어부가 수레 한가득 싣고 온 장어로 잔치를 열었고 앞으로 또다시 마을에 역병이 돌더라도 서로 돕고 의지해서 잘 이겨내자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뜻을 모아 관아와 함께 역병소(疫病所)와 피병소(避病所)를 만들어 그 후에도 수차례 발병한 역병들을 슬기롭게 이겨냈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