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자유의 시대' 그 성공조건은
자유 사회의 정부만이 개개인이 자신의 지식에 따라 선택할 자유와 각자가 소유한 재산을 존중하고 개인의 생명이 고귀함을 인정한다. 개인이 저마다 타인들의 자유와 재산 생명을 존중하는 한 그는 선택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또한 평화와 관용, 번영을 염원할 수 있다. 이같이 경제·도덕·법적 가치 그리고 심지어 미학적 가치를 지닌 게 자유다. 자유주의야말로 유토피아를 위한 유일한 프레임워크인 이유다.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는 심각하게 위축돼 있다. 자유를 홀대하는 사회다. 역사 교과서에 명시된 자유를 없애버린 ‘진보’ 진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보수’ 진영에서조차 ‘자유’ ‘시장’이라는 말은 단지 보수의 이념적 성향을 상징하는 단어일 뿐이다. 자유주의가 위축된 이유는 무엇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선언한 ‘자유의 시대’의 성공 조건을 가늠하려면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길을 가로막는 요인은 다양하다. 첫째로 미시, 거시, 계량, 수리가 대학 경제교육의 핵심을 이루는 경제학이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 자유는 무시하고 ‘사회적 편익’은 중요시한다. 개인은 사회적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반(反)자유·시장 정서를 조장하는 경제학인 이유다.

자유주의를 위축시킨 요인으로서 법실증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충돌하는 욕구들을 절충하는 걸 법의 역할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이다. 법에 대한 그런 시각은 법이 자유, 정의, 인간다움 등 바람직한 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규제, 의무, 명령과 같이 국가중심적인 사고를 불러왔다.

법의 역할은 그런 게 아니다. 갈등하는 욕구들이 스스로 상호 간 조정되는 조건을 확립하는 데 있다. 그 조건은 ‘자생적 질서’로서 시장의 기초가 되는 ‘자유의 법’이다. 세 번째로 현대 민주주의가 이해하고 있듯이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다수가 정한 것이면 무엇이든 심지어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의회는 어떤 제한도 받지도 않고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입법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 격이다. 멋대로 법을 찍어낸다. 의회의 ‘입법 폭주’, ‘입법 만능주의’라는 험악한 말이 생겨난 이유다.

자유주의를 위축시키는 그 같은 요인들의 상호작용 결과, 자유와 시장은 규제의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우리 사회는 법치 인식도 취약하다. 차별·특혜·소급입법 등의 얼룩진 규제가 첩첩이 쌓여 있는 이유다. 법치 위반은 입법의 정치화요 불의(不義)이고 인권과 개인의 존엄성 유린이다.

자유주의를 위축시키는 마지막 요인은 집단주의, 배려, 유대감, 나눔 등 소규모 사회에 적합한 인간의 본능적 태도다. 그런 본능의 눈으로 볼 때, 자본주의는 모든 악(惡)이 구조화된 체제처럼 보인다. 그런 체제를 극복해 아기자기하고 친근한 소규모 사회의 낭만적인 도덕적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려는 충동을 받는다. 그 결과는 옛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나치즘처럼 인류를 파멸로 이끈 갖가지 전체주의를 초래할 뿐이다.

대부분 지식인·학생·일반시민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은 부자 때문이라는 또는 시장과 경쟁은 약자를 강자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체제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배려, 나눔, 유대 등 소규모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감성적인 본능적 가치에 매우 민감하다. 민감성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민감성을 이용해 소규모 사회의 도덕을 거대 사회에 확대·적용하려는 포퓰리스트다.

이쯤에서만 봐도 반자유주의적 여론이 얼마나 뿌리 깊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여론을 극복하는 게 ‘자유의 시대’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이 자유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지적 모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만드는 길이다. 우리는 그런 지적 모험과 용기 창의·상상력을 동원해 자유 사회의 철학적 토대로서 자유의 가치를 매력적이고 살아 있는 자유주의 비전·정신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자유의 전망은 암울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네트워크로 묶을 물질적·정신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