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시장경제는 '투쟁'아닌 '경쟁' 따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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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를 내걸고 거리나서는 노동단체
싸움에만 의존하면 경제 생태계 파괴
시장경제는 경쟁 밀린 개인 도태 안시켜
윤혜준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싸움에만 의존하면 경제 생태계 파괴
시장경제는 경쟁 밀린 개인 도태 안시켜
윤혜준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생존경쟁’ 개념을 경제영역에 적용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시장경제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에서 밀려나는 이들이 ‘도태’되도록 방치하는 냉혹한 체제다. 따라서 이런 체제를 보완하는 ‘공유경제’와 ‘상생’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논리의 축이 되는 생존경쟁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그 발원지다. 1859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자연 선택, 또는 생명투쟁에서 유리한 종이 보존되는 방식을 따르는 종들의 기원’이다. 제목에 나온 ‘생명투쟁(struggle for life)’은 본문에서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과 호환되며 빈번히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다. 원문이 분명히 보여주듯, 다윈이 사용한 표현 struggle은 투쟁이지 경쟁이 아니다.
어쩌다 무슨 연유로 struggle for existence가 생존경쟁으로 오역됐을까? 아마도 경쟁이라는 한자어는 투쟁과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 지식인들이 그렇게 번역했을 법하다. 그러나 struggle과 competition은 엄연히 다르다. 지난 4월 11일자 칼럼에서 밝혔듯이, competition은 상대방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struggle이 아니다. 함께 같은 규칙을 따르는 ‘협력’의 뜻이 이 단어를 이끄는 ‘com-’에 배어 있다.
다윈의 핵심 개념 번역의 적합성을 새삼 따지게 된 계기는 투쟁만을 숭상하는 한국의 한 노동단체가 제공했다. ‘민주’라는 말을 문패에 내건 이 전국적 조직은 민주사회의 기본 원칙인 합의와 타협이 아니라, 그들의 ‘창립선언문’(1991년)에서 약속한 대로, ‘가열찬 투쟁’에 전념한다. 지난달 초 이 단체는 산하 조직 중 하나인 화물연대를 움직여 파업 투쟁에 나서게 해 대한민국의 물류를 정지시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이들은 ‘7·2 전국 노동자대회’를 열어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일상이 돼버린 노동조합의 투쟁을 다윈 식의 생존투쟁으로 볼 수 있을까? 날로 ‘진화’하는 기술과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업종이나 업체 및 개인은 ‘도태’될 위험에 노출된다. 노동조합이 집단행동을 통해 이런 도태를 막거나 지연시키려 하는 것은 자연법이 허용하는 ‘생존투쟁’과 비슷하다. 모든 생명체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기 마련이다. 영어의 struggle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다윈도 이런 어감을 감안해 생존투쟁 개념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투쟁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라면, 노동자들이 적대적 변화에 ‘목숨 걸고’ 맞서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변화에 부응하는 경쟁력을 갖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투쟁에만 의존하다 보면 경제의 생태계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존투쟁이 종과 종 사이뿐 아니라 같은 종에 소속된 개체 사이에서도 전개된다고 했다. 오히려 개체끼리의 투쟁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서로 ‘같은 지역을 돌아다니고, 같은 음식물이 필요하고, 같은 위험에 노출되기에’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도 가장 무서운 적들이다. 경제 행위자들의 세계에서도 개체·개인 간의 관계가 늘 평화로울 수는 없다. 제한된 승진 기회를 두고 입사 동기들은 서로 경쟁한다. 또한 업종이 같은 사업자들은 서로 시장점유율을 늘리려 경쟁한다. 그러나 이런 경쟁이 다윈 식의 생존투쟁은 아니다. 다윈이 묘사하는 ‘자연의 정치질서(polity of nature)’는 약자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열등한 종과 패배한 개체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오징어 게임’이 수십억 년째 진행되고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유연성은 경쟁에서 밀린 개인이나 단체들을 ‘도태’나 ‘멸종’, 즉 죽음으로 곧장 내몰지 않는다. 본인이 경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일터나 업종을 선택할 길은 활기찬 시장경제에서는 늘 열려 있기 마련이다.
‘경쟁력’보다는 ‘투쟁력’을 키우는 데 매진하는 노동조합에 소속된 같은 직장 동료들끼리는 어떨까? 경영진과의 투쟁은 조합을 구성하는 조합원들을 개인 사이의 생존투쟁에서 해방해줄까? 조합원의 신분, 임금, 복지 혜택을 투쟁으로 ‘사수’해주는 조직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간의 투쟁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노조 수장이 돼 노조 사무실에 편안히 앉아 월급을 챙기며 월급 주는 경영자에게 대들 수 있는 특권을 어떤 개인이 누릴지를 두고는 치열한 정치 투쟁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의 축이 되는 생존경쟁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그 발원지다. 1859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자연 선택, 또는 생명투쟁에서 유리한 종이 보존되는 방식을 따르는 종들의 기원’이다. 제목에 나온 ‘생명투쟁(struggle for life)’은 본문에서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과 호환되며 빈번히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다. 원문이 분명히 보여주듯, 다윈이 사용한 표현 struggle은 투쟁이지 경쟁이 아니다.
어쩌다 무슨 연유로 struggle for existence가 생존경쟁으로 오역됐을까? 아마도 경쟁이라는 한자어는 투쟁과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 지식인들이 그렇게 번역했을 법하다. 그러나 struggle과 competition은 엄연히 다르다. 지난 4월 11일자 칼럼에서 밝혔듯이, competition은 상대방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struggle이 아니다. 함께 같은 규칙을 따르는 ‘협력’의 뜻이 이 단어를 이끄는 ‘com-’에 배어 있다.
다윈의 핵심 개념 번역의 적합성을 새삼 따지게 된 계기는 투쟁만을 숭상하는 한국의 한 노동단체가 제공했다. ‘민주’라는 말을 문패에 내건 이 전국적 조직은 민주사회의 기본 원칙인 합의와 타협이 아니라, 그들의 ‘창립선언문’(1991년)에서 약속한 대로, ‘가열찬 투쟁’에 전념한다. 지난달 초 이 단체는 산하 조직 중 하나인 화물연대를 움직여 파업 투쟁에 나서게 해 대한민국의 물류를 정지시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이들은 ‘7·2 전국 노동자대회’를 열어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일상이 돼버린 노동조합의 투쟁을 다윈 식의 생존투쟁으로 볼 수 있을까? 날로 ‘진화’하는 기술과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업종이나 업체 및 개인은 ‘도태’될 위험에 노출된다. 노동조합이 집단행동을 통해 이런 도태를 막거나 지연시키려 하는 것은 자연법이 허용하는 ‘생존투쟁’과 비슷하다. 모든 생명체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기 마련이다. 영어의 struggle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다윈도 이런 어감을 감안해 생존투쟁 개념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투쟁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라면, 노동자들이 적대적 변화에 ‘목숨 걸고’ 맞서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변화에 부응하는 경쟁력을 갖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투쟁에만 의존하다 보면 경제의 생태계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존투쟁이 종과 종 사이뿐 아니라 같은 종에 소속된 개체 사이에서도 전개된다고 했다. 오히려 개체끼리의 투쟁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서로 ‘같은 지역을 돌아다니고, 같은 음식물이 필요하고, 같은 위험에 노출되기에’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도 가장 무서운 적들이다. 경제 행위자들의 세계에서도 개체·개인 간의 관계가 늘 평화로울 수는 없다. 제한된 승진 기회를 두고 입사 동기들은 서로 경쟁한다. 또한 업종이 같은 사업자들은 서로 시장점유율을 늘리려 경쟁한다. 그러나 이런 경쟁이 다윈 식의 생존투쟁은 아니다. 다윈이 묘사하는 ‘자연의 정치질서(polity of nature)’는 약자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열등한 종과 패배한 개체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오징어 게임’이 수십억 년째 진행되고 있다고 다윈은 믿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유연성은 경쟁에서 밀린 개인이나 단체들을 ‘도태’나 ‘멸종’, 즉 죽음으로 곧장 내몰지 않는다. 본인이 경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일터나 업종을 선택할 길은 활기찬 시장경제에서는 늘 열려 있기 마련이다.
‘경쟁력’보다는 ‘투쟁력’을 키우는 데 매진하는 노동조합에 소속된 같은 직장 동료들끼리는 어떨까? 경영진과의 투쟁은 조합을 구성하는 조합원들을 개인 사이의 생존투쟁에서 해방해줄까? 조합원의 신분, 임금, 복지 혜택을 투쟁으로 ‘사수’해주는 조직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 간의 투쟁이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노조 수장이 돼 노조 사무실에 편안히 앉아 월급을 챙기며 월급 주는 경영자에게 대들 수 있는 특권을 어떤 개인이 누릴지를 두고는 치열한 정치 투쟁이 불가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