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K-디폴트옵션', 찻잔속 태풍 우려된다
“이건 다른 나라와 다른 ‘한국식 디폴트옵션’이라고 봐야죠. 디폴트옵션 도입 의의를 살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정부가 지난 5일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의 주요 내용을 발표하자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연금 선진국들과 한국의 디폴트옵션 운영 방식이 너무 달라 도입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디폴트옵션이란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사전에 지정된 상품에 자동으로 적립금이 투입되는 제도다. 금융 지식 부족 등으로 퇴직연금을 방치하는 근로자를 위한 것으로 미국 호주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됐다.

대부분의 연금 선진국은 근로자들이 한 가지 디폴트옵션 상품만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퇴직연금사업자(증권사, 은행, 보험사 등)가 디폴트옵션 상품 여러 개를 기업에 제시하면 해당 기업은 그중 하나를 골라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받은 뒤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지정한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운용 지시를 일정 기간 하지 않으면 회사가 정한 한 가지 디폴트옵션 상품에 자동 가입된다. 디폴트옵션이 정착된 미국 호주 영국의 최근 10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평균 8~9%에 이른다.

한국은 퇴직연금사업자가 제시한 7~10개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기업이 모두 선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 등 선진국은 디폴트옵션 상품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돼도 기업의 책임을 면해주지만, 한국은 관련 법에 기업의 면책 조항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결국 근로자가 여러 개의 디폴트옵션 상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연금자산은 고유계정(현금성 자산)에 그대로 남는다. “근로자가 어떤 상품이 좋은지 몰라 아무 선택도 안 하고 방치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해외에서 디폴트옵션이 성공한 이유는 근로자에게 딱 한 가지 선택지만 제공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디폴트옵션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근로자 대부분이 투자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국회와 정부가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이유는 은퇴자들의 노후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국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2%대로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다. ‘쥐꼬리 수익률’이란 오명을 벗고 노후 자산 형성에 도움이 되려면 관련 법을 개정하는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