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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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영화감독 홍상수 씨가 청구한 이혼 소송이 기각됐다. 당시 재판부는 "홍상수 씨가 부인 A씨를 상대로 이혼 청구의 소를 제기한 사건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라며 "민법 제840조 제6호에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를 재판상 이혼 사유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고, 우리 판례는 이에 관하여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다"라고 밝혔다.

혼인 생활의 파탄에 대하여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그 파탄을 사유로 하여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언론에 편지를 보내 혼외자가 있음을 공개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아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합의이혼을 하지 못하고 소송을 진행하게 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혼 청구 자격은 크게 '유책주의'와 '파탄주의'로 나뉜다. 먼저 유책주의란 배우자가 동거 ·부양 ·정조 등 혼인 의무에 위반되는 행동을 한 경우 상대 배우자에게만 재판상 이혼 청구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파탄주의는 혼인 관계가 사실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깨졌다면 책임을 따지지 않고 이혼을 허용한다.

민법 제840조 '재판상 이혼 원인' 조항에 따르면 부부의 일방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1965년 9월 처음으로 '유책주의'를 채택한 이후 지금까지 이를 따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혼인 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라도 상대방이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예외적으로 이혼 청구가 가능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민법은 혼인 관계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가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없는 유책주의를 원칙적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일방 배우자의 유책성이 상당히 희석된 경우에는 예외적 청구를 인정하겠다는 취지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3일 한 차례 이혼소송이 기각된 후 5년간 별거 중인 남편 A씨가 부인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이혼 청구 사건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가정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 씨와 B 씨는 2010년 3월 혼인신고를 한 후 같은 해 12월 딸을 낳았다. 그러나 2011년부터 갈등이 생겼고 A 씨는 2016년 5월 집을 나가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17년 7월 A 씨에게 혼인 관계 파탄에 대한 더 큰 책임이 있다며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A 씨는 이혼소송 기각 후에도 B 씨와 별거한 채 혼인 생활로 돌아가지 못했다. B 씨와 딸은 A씨 명의로 임차한 아파트에서 별거 이후에도 계속 거주했다. A 씨는 2018년 3월 아파트 소유권을 취득하며 받은 대출금을 계속 갚으며 같은 해 11월부터 매월 50만원의 양육비를 지급했다. 그러나 B 씨는 딸을 만나기 위해선 자신에게 연락하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했고 아파트 잠금장치를 변경한 후 열쇠를 주지 않았다. A 씨는 2019년 9월 재차 이혼소송을 제기했지만, B씨는 이혼할 의사가 없다고 강조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B씨의 손을 들어 A 씨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이혼 청구 배우자의 유책성을 상쇄할 정도로 상대방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뤄진 경우 예외적으로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허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악화한 혼인 관계를 회복해 원만한 공동생활을 영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혼인 유지에 협조할 의무를 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인철 변호사는 "이혼법에 대변혁이 온 것일 수도 있다"면서 "대법원은 그동안 유책주의에 기초하여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다만 특별한 경우에만 인정함으로써 파탄주의에 상당한 제한을 가해 왔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혼인 생활의 회복이 불가능하여 법률이 예정한 부부 공동생활체로서의 혼인의 실체가 완전히 소멸하였다면, 이는 실질적인 이혼상태라 할 것이므로 그것에 맞게 법률관계를 확인․정리하여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며 "혼인 생활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파탄 상태에 이르러 혼인의 실체가 소멸한 이상 귀책 사유가 그 혼인 해소를 결정짓는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므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파탄에 이르게 된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민법 제840조 제6호의 이혼 사유에 의한 재판상 이혼 청구를 허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취지의 종전 대법원판례는 변경되어야 한다는 대법관들의 반대의견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은 그동안 유책주의에 따라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기각하면서 예외적으로 ①상대 배우자도 혼인 계속의 의사가 없으면서 오기나 보복적 감정으로 이혼을 거부하는 경우 ②부부 쌍방에게 파탄의 책임이 있는 경우 ③혼인 파탄 이후에 원고에게 유책행위가 존재하는 경우 등에만 제한적으로 허용해왔다"라며 "철저한 유책주의의 관철은 혼인 파탄이 사실상 부부 일방의 책임으로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탄에 이른 원인 또한 다양해서 배우자 가운데 과연 누가 이혼 원인의 제공자인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어 파탄주의적 사고를 도입해야 하지 않겠냐는 지적을 받아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과거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배제하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그 예외를 인정하여 왔으나 그 예외는 매우 드물었다"면서 "최근의 대법원판결들은 기본적으로 유책주의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파탄주의 이혼법을 지향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유책주의를 채택하지만, 예외적으로 파탄주의적 판례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 변호사는 "독일과 같이 명시적으로 파탄주의에 충실한 이혼 규정 [예를 들면, ‘부부가 3년 이상 별거한 경우에는 그 원인과 관계없이 혼인이 파탄된 것으로 보아서 이혼을 허용한다.’(독일 민법 제1565조, 제1566조 참조)]이 없는 현행법하에서 파탄주의적 사고의 결론을 도출할 사례들의 필요성이 있다"면서 "파탄주의가 당사자들의 자유에는 부합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책배우자의 보호 문제라든지, 자녀의 양육 문제 등이 발생하고, 우리나라처럼 처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는 축출이혼 방지 등을 위해 유책주의적 사고도 필요한 만큼 대법원은 유책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필요성에 따른 파탄주의적 사고를 확대해 나감으로써 이혼과 관련한 당사자의 권리, 의무를 충실히 보호하고자 하는 이상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혼 청구에 대해서는 이혼 여부를 일률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혼 청구를 인정할 것인지를 고려하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유책주의에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치열한 감정대립으로 불필요한 소모전이 되어 당사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부작용이 있다"고 전했다.

세계의 이혼법은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가는 추세다. 미국의 대부분의 주,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여러 선진국이 파탄주의를 채택하거나 파탄주의 요소를 병행하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참고할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변호사는 "혼인을 유지할 것인지, 혼인을 해소할 것인지는 결국 각 경우의 당사자와 자녀들의 고통과 피해를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파탄주의를 도입하더라도 제한 없는 파탄주의보다는 유책주의와 병행하거나, '이혼으로 인하여 경제적 파멸이나 정신적 고통이 충격이 될 정도라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가혹 조항을 둔다면 파탄주의의 폐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