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범부채가 펼친 꽃잎을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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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식물학자 신혜우의 야생화와 나
범무늬 선명한 꽃 '범부채'
빗속서도 고개 안숙이고
날선 잎을 부채처럼 세워
정교한 회오리 모양으로
꽃이 진 모습도 '단정'
슬프게 허물어지며 지는
다른 꽃잎들과 달리
단정한 끝맺음 아름다워
식물학자 신혜우의 야생화와 나
범무늬 선명한 꽃 '범부채'
빗속서도 고개 안숙이고
날선 잎을 부채처럼 세워
정교한 회오리 모양으로
꽃이 진 모습도 '단정'
슬프게 허물어지며 지는
다른 꽃잎들과 달리
단정한 끝맺음 아름다워
날개 달린 곤충들이 나뭇잎 밑에서 빗방울을 피하며 우울해진다. 나는 쏟아지는 여름비를 보면 그렇게 상상한다. 비가 많은 계절인 여름은 봄처럼 꽃이 피기 좋은 시기는 아니다. 봄에 이미 꽃을 피워 여름에 풋열매를 맺은 식물은 세찬 빗줄기로 빈약한 열매를 솎아내 떨어뜨린다. 빈약한 열매는 씨앗을 잘 품지 못한다. 빗줄기 세례는 건실한 열매만 남도록 식물을 도와주는 셈이다.
여름에 꽃을 피우기로 결심한 식물들에게 세찬 빗줄기는 대개 시련이다. 물을 이용해 꽃가루를 퍼뜨리는 일부 꽃과 달리 곤충을 기다리는 꽃에게는 말이다. 사방을 향해 피어야 할 꽃댕강나무의 종 모양 꽃들은 쏟아지는 빗방울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점점이 노란빛으로 나무를 장식해야 할 모감주나무의 꽃들은 빗방울마다 떨어져 땅바닥을 노랗게 장식해 버린다. 나뭇잎 밑에서 우울한 곤충들처럼 여름꽃들도 우울해진다.
빗속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떨어진 꽃들과 달리 범부채는 여름에 한결같은 모습이다. 날카롭고 납작한 칼을 닮은 잎들을 부채처럼 펼쳐낸다. 잎보다 한참 높은 곳에 꽃줄기가 올라와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이 하늘을 향한다. 비가 와도 개의치 않는다. 강렬한 꽃과 시원한 잎사귀를 동시에 묘사하는 범부채라는 이름까지 여름과 어울린다. 범부채는 벨람칸다 시넨시스(Belamcanda chinensis)라는 학명으로 오랫동안 불렸다. 그러다 식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아이리스 도메스티카(Iris domestica)라는 학명으로 바뀌며 붓꽃속(Iris)으로 옮겨가 붓꽃들과 한 가족이 됐다. 서정적인 보랏빛 꽃들이 즐비한 붓꽃의 세계에서 주홍빛 광채는 너무 튀는 빛깔이었다. 게다가 손수건처럼 가냘프게 늘어지는 꽃잎도, 수줍게 숨어 있는 꽃밥도, 실핏줄 같은 꽃잎 맥도 가지지 않았다. 레오파드 릴리(leopard lily)라는 영어 이름처럼 꽃잎의 범 무늬가 뚜렷하다. 넓게 펼쳐지는 시원스러운 잎도, 윤이 나는 까만 열매가 탐스러운 것도 붓꽃들 틈에선 시선을 끈다. 그래서 범부채는 붓꽃들과 따로 떨어져 외로운 가족, 벨람칸다속(Belamcanda)에 오랫동안 홀로 있었다.
범부채를 정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 강렬한 꽃을 보고 외국에서 온 식물이라 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범부채는 한국 자생식물이다.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걸쳐 피어난다. 꽃이 화려해도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범부채의 고상한 모습은 매력적이어서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 관상용으로 소개됐다.
범부채의 드러난 매력에 가려진 숨은 비밀이 있다. 나는 그걸 전하며 한여름의 꽃으로 범부채를 소개한다. 활짝 핀 범부채 주변을 살펴보면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짜 꽃봉오리고 다른 하나는 꽃이 진 모습이다. 꽃이 피기 전과 꽃이 진 후가 모두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이유는 꽃이 진 모습이 너무도 단정하기 때문이다. 진짜 꽃봉오리는 작은 꽃잎을 겹겹이 포갠 모양새고, 꽃이 진 모습은 정교하게 회오리처럼 감아놓은 모양새다. 회오리, 즉 나선상 배열은 꽃이 가진 중요한 규칙 중 하나다. 하나의 중심에 여러 꽃잎이 붙어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피보나치수열. 술패랭이나 나팔꽃처럼 많은 꽃이 꽃봉오리일 때 꽃잎이 회오리처럼 감겨 있다. 그러다 서서히 역방향으로 풀어지며 꽃을 피운다. 그러나 범부채는 포개진 꽃잎이 그대로 내려와 펼쳐지는 담백한 개화의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꽃이 질 때 꼼꼼한 꽃잎의 정돈에서 나선형을 관찰할 수 있다. 대개 꽃들은 비장한 준비와 달리 꽃이 질 때 꽃잎들을 슬프게 허물어뜨린다. 꽃이 지는데 더 이상의 수고는 무의미하지 않냐며. 그래서인지 범부채의 단정한 끝맺음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떨어진 꽃을 주워 간다. 꽃 속의 신비를 나누고 싶지만 피어 있는 꽃을 꺾기엔 용서를 구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미 절정이 지나 땅에 떨어져 잠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꽃을 서둘러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가서 사람들과 초조하게 인사를 하고 꽃을 꺼내 보면 이미 형체를 알 수 없게 쪼그라들어 슬그머니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곤 한다. 며칠 전, 모감주나무꽃의 젖혀진 손가락 같은 꽃잎과 안쪽의 붉은 무늬를 보여주고자 했을 때도 그랬다. 탁자 위에 올려 둔 모감주나무꽃은 갈색으로 쪼그라들어 먹다가 흘린 케이크 조각과 구별되지 않아 나를 섭섭하게 했다. 나는 요즘 시들어버린, 아니, 꽃잎을 단정하게 감아올린 범부채를 사람들에게 가져간다.
더위와 습기에 늘어지고 지쳐 단정치 못하기 쉬운 여름, 범부채의 뒷모습은 늘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범부채는 진정 한여름의 꽃이다.
신혜우 식물세밀화가·식물학자·《이웃집 식물상담소》 《식물학자의 노트》 작가
여름에 꽃을 피우기로 결심한 식물들에게 세찬 빗줄기는 대개 시련이다. 물을 이용해 꽃가루를 퍼뜨리는 일부 꽃과 달리 곤충을 기다리는 꽃에게는 말이다. 사방을 향해 피어야 할 꽃댕강나무의 종 모양 꽃들은 쏟아지는 빗방울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점점이 노란빛으로 나무를 장식해야 할 모감주나무의 꽃들은 빗방울마다 떨어져 땅바닥을 노랗게 장식해 버린다. 나뭇잎 밑에서 우울한 곤충들처럼 여름꽃들도 우울해진다.
빗속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떨어진 꽃들과 달리 범부채는 여름에 한결같은 모습이다. 날카롭고 납작한 칼을 닮은 잎들을 부채처럼 펼쳐낸다. 잎보다 한참 높은 곳에 꽃줄기가 올라와 범 무늬가 선명한 주홍빛 꽃이 하늘을 향한다. 비가 와도 개의치 않는다. 강렬한 꽃과 시원한 잎사귀를 동시에 묘사하는 범부채라는 이름까지 여름과 어울린다. 범부채는 벨람칸다 시넨시스(Belamcanda chinensis)라는 학명으로 오랫동안 불렸다. 그러다 식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아이리스 도메스티카(Iris domestica)라는 학명으로 바뀌며 붓꽃속(Iris)으로 옮겨가 붓꽃들과 한 가족이 됐다. 서정적인 보랏빛 꽃들이 즐비한 붓꽃의 세계에서 주홍빛 광채는 너무 튀는 빛깔이었다. 게다가 손수건처럼 가냘프게 늘어지는 꽃잎도, 수줍게 숨어 있는 꽃밥도, 실핏줄 같은 꽃잎 맥도 가지지 않았다. 레오파드 릴리(leopard lily)라는 영어 이름처럼 꽃잎의 범 무늬가 뚜렷하다. 넓게 펼쳐지는 시원스러운 잎도, 윤이 나는 까만 열매가 탐스러운 것도 붓꽃들 틈에선 시선을 끈다. 그래서 범부채는 붓꽃들과 따로 떨어져 외로운 가족, 벨람칸다속(Belamcanda)에 오랫동안 홀로 있었다.
범부채를 정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 강렬한 꽃을 보고 외국에서 온 식물이라 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범부채는 한국 자생식물이다.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걸쳐 피어난다. 꽃이 화려해도 잎에 비하면 작고 단아하며 높은 꽃줄기에 몇 개만 피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하고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범부채의 고상한 모습은 매력적이어서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 관상용으로 소개됐다.
범부채의 드러난 매력에 가려진 숨은 비밀이 있다. 나는 그걸 전하며 한여름의 꽃으로 범부채를 소개한다. 활짝 핀 범부채 주변을 살펴보면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짜 꽃봉오리고 다른 하나는 꽃이 진 모습이다. 꽃이 피기 전과 꽃이 진 후가 모두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이유는 꽃이 진 모습이 너무도 단정하기 때문이다. 진짜 꽃봉오리는 작은 꽃잎을 겹겹이 포갠 모양새고, 꽃이 진 모습은 정교하게 회오리처럼 감아놓은 모양새다. 회오리, 즉 나선상 배열은 꽃이 가진 중요한 규칙 중 하나다. 하나의 중심에 여러 꽃잎이 붙어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피보나치수열. 술패랭이나 나팔꽃처럼 많은 꽃이 꽃봉오리일 때 꽃잎이 회오리처럼 감겨 있다. 그러다 서서히 역방향으로 풀어지며 꽃을 피운다. 그러나 범부채는 포개진 꽃잎이 그대로 내려와 펼쳐지는 담백한 개화의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꽃이 질 때 꼼꼼한 꽃잎의 정돈에서 나선형을 관찰할 수 있다. 대개 꽃들은 비장한 준비와 달리 꽃이 질 때 꽃잎들을 슬프게 허물어뜨린다. 꽃이 지는데 더 이상의 수고는 무의미하지 않냐며. 그래서인지 범부채의 단정한 끝맺음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떨어진 꽃을 주워 간다. 꽃 속의 신비를 나누고 싶지만 피어 있는 꽃을 꺾기엔 용서를 구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미 절정이 지나 땅에 떨어져 잠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꽃을 서둘러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가서 사람들과 초조하게 인사를 하고 꽃을 꺼내 보면 이미 형체를 알 수 없게 쪼그라들어 슬그머니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곤 한다. 며칠 전, 모감주나무꽃의 젖혀진 손가락 같은 꽃잎과 안쪽의 붉은 무늬를 보여주고자 했을 때도 그랬다. 탁자 위에 올려 둔 모감주나무꽃은 갈색으로 쪼그라들어 먹다가 흘린 케이크 조각과 구별되지 않아 나를 섭섭하게 했다. 나는 요즘 시들어버린, 아니, 꽃잎을 단정하게 감아올린 범부채를 사람들에게 가져간다.
더위와 습기에 늘어지고 지쳐 단정치 못하기 쉬운 여름, 범부채의 뒷모습은 늘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범부채는 진정 한여름의 꽃이다.
신혜우 식물세밀화가·식물학자·《이웃집 식물상담소》 《식물학자의 노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