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대졸공채 정선혜 씨 37년 근무 후 '첫 여성 정년은퇴'
“회사가 여러분을 필요로 해서 뽑은 것은 아니다. 정부에서 각 기업에 여성 대학졸업자 채용 할당을 줬다. 여러분이 할 일을 찾아봅시다.”

1985년 1월 삼성그룹 여성 대졸 공채 2기로 입사한 정선혜 씨(60·사진)가 출근 첫날 들은 얘기다. 처음엔 막막했다. 1980년대만 해도 대기업에서 활약하는 여성은 드물었다. 여성 대졸 공채를 뽑아도 1년 안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정씨는 입사 첫해부터 늘 고민했다. “내가 몇 년이나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 있을까.” 그랬던 그는 37년5개월간 근무를 마치고 지난 8일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기획팀에서 정년퇴직했다. 삼성 여성 대졸 공채 합격자가 정년까지 채운 것은 정씨가 처음이다.

정씨는 15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막막한 날도 많았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며 “어떤 열악한 환경도 의지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꼭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1980년대부터 근무한 여성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정씨와 같은 해 입사한 여성 대졸 공채 동기는 총 65명이지만 대부분 근속 3년을 못 채우고 떠났다. 정씨는 “입사 초기에 1기 6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퇴사했다”며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대기업 직장문화에서 버티는 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정씨는 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삼성물산 배치 7개월 만에 삼성전자로 발령이 났고, 이때부터 반도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에서 인텔 프로젝트 관련 영문 번역을 하는 게 첫 업무였다. 그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를 악물었다”며 “새벽 1~2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을 포함해 쉬는 날은 한 달에 이틀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어진 업무엔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다”고 강조했다.
삼성 대졸공채 정선혜 씨 37년 근무 후 '첫 여성 정년은퇴'
그는 “한직으로 쫓겨났다고 생각했던 삼성 반도체가 이렇게 세계 1위 반열에 오를 줄 몰랐다”며 “꾸준히 준비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대외 협력 분야에서 강점을 보여 여성 최초로 기술기획그룹장에 오르기도 했다.

정씨는 “옛날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낮은 고과나 승진 누락 등을 겪은 적도 있다”며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는 부모님이 입사 축하 기념으로 해주신 불고기 파티를 떠올리며 버텼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회사생활의 노하우로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씨는 “어떤 업무든 누군가와 협업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며 “도움을 청하고 결과가 나오면 항상 그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네트워크를 이어가는 게 좋다”고 했다.

정씨는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에서 존재감이 남달랐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삼성전자 인사팀은 정씨의 근무 소감 등을 담은 자체 인터뷰 내용을 책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유튜브 채널 ‘에스로그’에서 정씨의 마지막 이틀간 근무를 브이로그 콘텐츠로 공개하기도 했다. 회사 관계자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흩어지는 시대에 보기 드문 동료였다”고 말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