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누른 에너지 위기…달라진 에너지 기업 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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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에너지 기업들의 주주총회에 올라온 기후변화 관련 안건의 통과율이 급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화석연료 공급난이 가중되면서 주주들이 에너지 공급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후 관련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한경ESG] ESG NOW
투자 전문 매체 배런스에 따르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업체의 지난 2분기 주주총회에 상정된 기후 관련 안건은 50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지난 5월까지 과반 이상 찬성으로 안건이 통과된 사례는 10건에 불과하다. 지난해 2분기엔 26건이 상정돼 이 중 10건이 통과됐다. 상정된 안건은 2배 가까이 늘었지만, 통과 건수는 하나도 늘지 않았다.
지난해와 올해 각각 주주총회에 올라온 비슷한 내용의 기후변화 관련 안건을 비교하면 달라진 주총장의 분위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 5월 엑슨모빌 주주총회에선 네덜란드 비영리단체 팔로우디스가 낸 결의안이 2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이 안건은 자체 제품과 협력사 제품의 사용·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포함한 개념인 ‘스코프 3’에 맞춰 탄소감축 목표량을 설정하라는 내용이었다.
엑슨모빌·셰브런, 기후 안건 잇따라 부결
지난해 6월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엔진넘버원이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를 요구하며 이사진으로 제안한 후보 4명 중 3명이 선임된 것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반전됐다. 당시 엔진넘버원의 엑슨모빌 지분율은 0.02% 수준이었지만, 블랙록 등 주요 주주들이 엔진넘버원의 손을 들어줬다. 대런 우즈 엑슨모빌 최고경영자(CEO)는 “세계적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고 제품 가격 상승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 생산 투자를 늘리고 있다”며 “스코프 3의 목표치를 설정하는 게 효과적인 관리법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셰브런에서도 지난 5월 비슷한 기후변화 관련 안건이 주주총회에 올라왔다. 찬성률은 33%로, 지난해 수준(61%)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미국 필립스66(80%→36%), 미국 코노코필립스(58%→39%), 영국 BP(21%→15%) 등 다른 에너지업체들도 올해 들어 기후변화 관련 안건의 찬성률이 하락했다. 미국 옥시덴탈페트롤리엄(17%), 마라톤페트롤리엄(16%) 등 찬성률이 20%에 못 미치는 기업도 속출했다.
투자업계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야기된 에너지 공급난이 기후변화 안건의 좌초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월 초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에너지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서둘러 추진할 만한 유인이 줄었다는 얘기다.
엑슨모빌, 셰브런 등의 지난 2분기 주주총회에서 기후 관련 안건의 상정을 주도한 팔로우디스는 “에너지 위기가 기후 위기를 능가한다고 주장한 대형 석유업체들의 논리가 일부 투자자에게 먹혔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 우즈 CEO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일 때 에너지 공급을 줄이는 게 주주나 사회에 최선의 이익은 아닐 것”이라며 투자자에게 기후 관련 결의안에 반대할 것을 촉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에너지업계의 입김이 큰 지역에서 ESG 행보에 반대 움직임을 보인 것도 주주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1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는 블랙록 머니마켓 펀드를 주(州) 재무부 투자 이사회의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석탄·석유·천연가스 산업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탄소배출 제로’ 투자전략을 기업에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달 댄 패트릭 텍사스주 부지사도 비슷한 이유로 “블랙록을 투자 리스트에서 제외해야 한다”며 투자업계를 압박했다. 기후 관련 ESG 투자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ESG가 거짓된 사회정의 전사들에 의해 무기화됐다”며 “ESG는 사기”라고 말한 경우가 그렇다. 머스크는 S&P500 ESG 지수에서 테슬라가 제외된 반면 엑슨모빌이 이 지수에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았다. 환경 개선에 기여하는 전기차가 ESG 투자에서 소외되고 탄소배출이 문제가 되는 화석연료 기업이 ESG 투자 범주에 묶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CNBC에 따르면 테슬라는 그간 ‘E’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최근 광산 오염, 사업장 내 인종차별, 열악한 노동조건 등이 ESG상의 문제로 지적받기도 했다.
블랙록 “화석연료·재생에너지 모두 투자해야”
에너지 기업의 ‘E’ 투자가 다시 탄력을 받을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에너지 공급난으로 화석연료 생산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결국 탄소배출 절감과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해 사업 구조를 개편해야 하는 에너지업계의 근본 여건은 바뀌지 않았다는 논리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환경 연구소 세레스는 “기업 이사회는 찬성표가 30%만 나와도 진지하게 기후 결의안을 고려한다”며 “첫 제안한 안건이 수정을 거듭하면서 상정 2~3년 차에 더 높은 득표율을 얻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세레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주주총회 투표에 앞서 합의에 따라 상정이 철회된 기후 관련 안건은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한 100여 개에 이른다. 철회된 안건 상당수는 회사와 주주 간 ESG 경영을 놓고 벌인 치열한 협상의 결과라는 것이 세레스의 설명이다.
블랙록도 지난 7월 15일 2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장기적 차원에서 ESG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성명문에서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전환 기간 동안 에너지를 저렴한 비용으로 계속 생산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은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 모두에 투자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주현 한국경제 기자 deep@hankyung.com
지난해와 올해 각각 주주총회에 올라온 비슷한 내용의 기후변화 관련 안건을 비교하면 달라진 주총장의 분위기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 5월 엑슨모빌 주주총회에선 네덜란드 비영리단체 팔로우디스가 낸 결의안이 2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이 안건은 자체 제품과 협력사 제품의 사용·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포함한 개념인 ‘스코프 3’에 맞춰 탄소감축 목표량을 설정하라는 내용이었다.
엑슨모빌·셰브런, 기후 안건 잇따라 부결
지난해 6월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엔진넘버원이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를 요구하며 이사진으로 제안한 후보 4명 중 3명이 선임된 것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반전됐다. 당시 엔진넘버원의 엑슨모빌 지분율은 0.02% 수준이었지만, 블랙록 등 주요 주주들이 엔진넘버원의 손을 들어줬다. 대런 우즈 엑슨모빌 최고경영자(CEO)는 “세계적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고 제품 가격 상승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 생산 투자를 늘리고 있다”며 “스코프 3의 목표치를 설정하는 게 효과적인 관리법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셰브런에서도 지난 5월 비슷한 기후변화 관련 안건이 주주총회에 올라왔다. 찬성률은 33%로, 지난해 수준(61%)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미국 필립스66(80%→36%), 미국 코노코필립스(58%→39%), 영국 BP(21%→15%) 등 다른 에너지업체들도 올해 들어 기후변화 관련 안건의 찬성률이 하락했다. 미국 옥시덴탈페트롤리엄(17%), 마라톤페트롤리엄(16%) 등 찬성률이 20%에 못 미치는 기업도 속출했다.
투자업계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야기된 에너지 공급난이 기후변화 안건의 좌초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월 초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에너지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서둘러 추진할 만한 유인이 줄었다는 얘기다.
엑슨모빌, 셰브런 등의 지난 2분기 주주총회에서 기후 관련 안건의 상정을 주도한 팔로우디스는 “에너지 위기가 기후 위기를 능가한다고 주장한 대형 석유업체들의 논리가 일부 투자자에게 먹혔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 우즈 CEO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일 때 에너지 공급을 줄이는 게 주주나 사회에 최선의 이익은 아닐 것”이라며 투자자에게 기후 관련 결의안에 반대할 것을 촉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에너지업계의 입김이 큰 지역에서 ESG 행보에 반대 움직임을 보인 것도 주주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1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는 블랙록 머니마켓 펀드를 주(州) 재무부 투자 이사회의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석탄·석유·천연가스 산업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탄소배출 제로’ 투자전략을 기업에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달 댄 패트릭 텍사스주 부지사도 비슷한 이유로 “블랙록을 투자 리스트에서 제외해야 한다”며 투자업계를 압박했다. 기후 관련 ESG 투자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ESG가 거짓된 사회정의 전사들에 의해 무기화됐다”며 “ESG는 사기”라고 말한 경우가 그렇다. 머스크는 S&P500 ESG 지수에서 테슬라가 제외된 반면 엑슨모빌이 이 지수에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았다. 환경 개선에 기여하는 전기차가 ESG 투자에서 소외되고 탄소배출이 문제가 되는 화석연료 기업이 ESG 투자 범주에 묶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CNBC에 따르면 테슬라는 그간 ‘E’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최근 광산 오염, 사업장 내 인종차별, 열악한 노동조건 등이 ESG상의 문제로 지적받기도 했다.
블랙록 “화석연료·재생에너지 모두 투자해야”
에너지 기업의 ‘E’ 투자가 다시 탄력을 받을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에너지 공급난으로 화석연료 생산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결국 탄소배출 절감과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해 사업 구조를 개편해야 하는 에너지업계의 근본 여건은 바뀌지 않았다는 논리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환경 연구소 세레스는 “기업 이사회는 찬성표가 30%만 나와도 진지하게 기후 결의안을 고려한다”며 “첫 제안한 안건이 수정을 거듭하면서 상정 2~3년 차에 더 높은 득표율을 얻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세레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주주총회 투표에 앞서 합의에 따라 상정이 철회된 기후 관련 안건은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한 100여 개에 이른다. 철회된 안건 상당수는 회사와 주주 간 ESG 경영을 놓고 벌인 치열한 협상의 결과라는 것이 세레스의 설명이다.
블랙록도 지난 7월 15일 2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장기적 차원에서 ESG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성명문에서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전환 기간 동안 에너지를 저렴한 비용으로 계속 생산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은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 모두에 투자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주현 한국경제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