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신흥국들의 화폐 가치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강도 높은 긴축으로 달러화 가치가 수직 상승하고 있는 와중에도 동남아 환율이 잘 버텨주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엔화, 유럽 유로화 등 선진국 통화가 강달러 흐름에 맥을 못추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20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달러화 대비 각국 통화의 환율 변동률을 추적한 결과 올해 신흥국 통화의 하락률은 평균 7%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싱가포르 달러는 3.2%,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5% 가량 절하됐다. 필리핀 페소, 태국 바트, 인도 루피, 말레이시아 링깃 등은 통화가치 하락률이 5%를 넘겼지만, 엔화(17%)와 유로화(11%)의 달러화 대비 하락률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잘 방어했다.

이는 강달러 압력에 유독 취약했던 과거 전례를 교훈 삼아 동남아 중앙은행들이 선제적으로 긴축에 나선 덕분이다. 싱가포르은행의 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 미국 Fed발 테이퍼 텐트럼(긴축 발작)을 경험했던 신흥국들이 당시 학습 효과로 이번엔 빠른 대처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지난해 10월을 시작으로 이달 초까지 두 달 간격으로 강도 높은 긴축 진행하고 있다. 오는 3월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한 Fed보다 반 년가량 앞섰다. 이 이코노미스트는 "선제적인 긴축 전환뿐만 아니라 신흥국의 경상수지 적자 우려가 과거보다 옅어진 점도 환율 하락세를 잘 막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최근 관광업, 통신업 등 국가 주요 산업의 성장세가 예상됨에 따라 경제 기초 체력이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달러화 대비 통화가치 하락률이 낮은 동남아국가들. 노란색 막대가 주요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률. 출처=FT
달러화 대비 통화가치 하락률이 낮은 동남아국가들. 노란색 막대가 주요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률. 출처=FT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경우 원자재 가격 상승이 환율 방어로 이어졌다. 이들 국가의 대표 수출품인 천연가스와 팜유 등의 가격이 오르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해 달러 유입량이 늘어났다. 호주 은행 ANZ의 한 아시아투자전략가는 "인도네시아는 현재까지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은 아니지만, 팜유 수출 등에서 엄청난 무역 흑자를 기록함에 따라 환율 방어가 잘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인도 루피는 이번주 들어 달러당 80루피를 기록하며 사상 최저치에 근접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한 인도 투자 담당은 "인도는 에너지 비용 등 수입물가가 상승하고 금 수요가 급증해 외환보유액이 340억달러 감소하는 등 일부 위기 요인들이 있긴 하다"면서도 "아직까진 루피 가치가 다른 신흥국 통화가치와 비슷한 수준의 평가절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장 정부 개입이 필요할 만큼 위급하진 않다"고 진단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