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 코엔 감독의 '뮤지엄 아워스'(Museum Hours·2012) 얘기입니다. 이 작품은 영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스크린을 곧 미술관으로 만듭니다.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요한(바비 소머)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매일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작품들을 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는 캐나다에서 온 앤(메리 마가렛 오하라)에게 미술관 안내를 해 주며 그 감동을 함께 나눕니다.
작품은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무엇보다 미술관 자체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카메라는 미술관 곳곳을 비추고, 개별 그림들을 담아냅니다. 그림 속에 아주 작게 표현된 인물들도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죠. 그 시선을 따라 영화를 보다 보면 직접 미술관에 다녀온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뮤지엄 아워스'에 나오는 미술관은 유럽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인 빈 미술사 박물관입니다. 1891년 개관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와 여러 후원자들의 수집품과 유물을 집대성해 놓았습니다. 특히 피터르 브뤼헐, 렘브란트 반 레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의 명화가 가득해 전 세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영화는 그중 브뤼헐(1525~1569)의 그림을 소개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10여 분의 도슨트가 설명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도, 요한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고 콕 집어 얘기하는 사람도 브뤼헐입니다. 그만큼 빈 미술사 박물관에선 브뤼헐의 그림들의 비중이 높고 중요합니다.
브뤼헐은 플랑드르(현 네덜란드)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별명은 '농민의 브뤼헐' 이었습니다. 농부들을 포함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화폭에 담았기 때문이죠.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신화 속 인물, 왕이나 귀족들을 그렸는데요. 브뤼헐은 정반대로 농부와 서민의 일상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그린 농부 그림 중엔 '농부의 결혼식'이란 작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이 그림이 자세히 다뤄지죠.
작품을 함께 살펴보실까요. 중앙에 머리 위에 화관을 얹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성이 신부입니다. 신랑이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당시 신랑은 피로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림에선 신랑이 하객을 접대하고 있다는 추측도 나옵니다. 만약 접대를 하고 있다면 맨 왼쪽에서 술을 따르고 있거나, 오른쪽에서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남성이 신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객들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며 함께 음식을 먹고 있네요. 귀족들처럼 화려한 결혼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즐겁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브뤼헐은 농부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평소에도 그들처럼 옷을 입고 함께 어울렸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어색해 할까봐 그림도 그 자리에서 그리지 않고, 잘 기억해 뒀다가 집으로 돌아와 화폭에 담았습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브뤼헐의 '바벨탑'이란 작품도 유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을 그린 것으로, 탑의 내·외부에서 일꾼들이 힘든 노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볼까요. 탑을 더 높이 쌓을 구상만 하며 한껏 고무된 인물들이 보이네요. 그리고 노역으로 쇠약해진 일꾼들이 그들의 발 밑에 엎드려 있습니다.
브뤼헐은 이 작품을 통해 끝없이 높은 탑을 쌓으며 물질에만 천착하는 인간들의 오만함을 경고했습니다. 노역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고되고 아픈 모습도 함께 담았죠. 빈이 아닌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있는 브뤼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란 작품도 함께 보실까요.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죠. 그는 날개를 만들어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 바다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선 대체 이카로스가 어디 있는 건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찾으셨나요?
그림의 오른쪽에 어부와 범선 사이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의 것입니다. 제목에 이름이 나온 것치곤, 너무 비중이 작고 초라하게 표현돼 있죠.
그림은 오히려 다른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농부는 쟁기질을 하고 있으며, 양치기는 양을 치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어부는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카로스가 추락하든 말든 이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이 작품은 동시에 인간의 무심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과 곤경엔 무관심한 세태를 그린 겁니다. 영화에서 요한은 "내게 그림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고, 더욱이 브뤼헐 그림이라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이어 그는 브뤼헐의 한 그림 속 인물의 모자에서 프라이팬 같은 것이 도드라져 보인 적이 있는데, 다른 작품에도 비슷한 게 있는지 여러 번 둘러보며 찾아본 적이 있다고 얘기하죠.
볼 때마다 새롭고, 감동을 주는 것은 브뤼헐의 그림뿐만이 아닐 겁니다. 다양한 명작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은 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나아가 빈 미술사 박물관과 같은 좋은 미술관을 찾아 다수의 명작들을 찬찬히 둘러본다면 더 큰 환희를 느낄 수 있겠죠. 오늘은 시간을 내 미술관으로의 산책을 떠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