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만 들으면 '디지털'스러운 분위기를 팍팍 풍기지만 정작 이 회사의 서비스에는 '아날로그'의 향기가 배어납니다. 문서와 책을 스캔해주고 자신만의 손 글씨를 폰트로 만들어 줍니다. 회사 대표는 AI 개발자임에도 AI 시대의 도래를 걱정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산업화 시대의 아이콘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꼽습니다.
직원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라고 하는 '이상한 대표'. 한경 긱스(Geeks)가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를 찾아 그의 생각과 경영관을 들어봤습니다.
“기억하세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전화를 두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이해 못했어요. 송금하려면 인터넷뱅킹에 접속해서 공인인증서 로그인했고요!”
‘토스’에서 간편 송금하거나 ‘배달의 민족’ 앱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건 처음엔 '이상한 아이디어'였다. 한마디로 대기업의 층층시하 결재라인에선 살아남기 쉽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 지점에서 스타트업이 경쟁력이 생긴다. PC 시대를 대표하는 커뮤니티 '세이클럽'과 스마트폰 카메라 앱 'B612'를 개발한 천재 개발자에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보이저엑스의 창업가로 변신한 남세동 대표의 말이다.
20일 서울 서초동 본사에서 만난 남 대표는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뾰족한 생각' 즉 이상한 생각을 최대한 많이 실행해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임자 해봤어?" 말 그대로다.
대기업이 못하는 것, 그래서 스타트업이 잘하는 것
개발은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돈으로 해결되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개발자만 수만 명 확보한 구글의 알파벳이 AI 딥러닝 분야에서 압도적인 이유다. 개발자 구인난에 허덕이는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이기기 힘들다는 얘기도 나온다.
남 대표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뭐가 있냐는 논리로 생각하면 대기업이 AI를 다 장악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대기업은 스타트업만큼 이상하고 새로운 ‘뾰족한 일’을 못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세상이 다 변하고 나서, 더 이상 이상한 생각이 아닌 게 되면 그제야 대기업이 따라 하는데, 그럼 이미 늦죠.”
6개월 내 사업화 가능한 아이디어만 채택
보이저엑스에선 2주 이내 프로토타입을 완성하고 6개월 내 서비스 출시가 가능한 프로젝트 아이디어만 채택된다. 남 대표는 “어떤 아이디어든 실패할 확률이 90%이기 때문에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다”며 “많이 해보기 위해 빨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보다 잘하려면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남들이 다 이상하다고 보는 뾰족한 일을 해야 하는데, 대기업이 거의 유일하게 못 하는 게 뾰족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뾰족한 일은 실패 확률이 높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검증할 방법이 빨리해보는 것밖에 없어요.”
빨리하면 대충한다고들 생각하지만, 오히려 잘하려고 하면 대충하게 된다는 게 남 대표의 생각이다. 잘하려고 하면 자기만의 세상에서 혼자 머리를 굴리다가, 잘못된 방향을 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너무 정성들여 만들었지만 딱히 쓸모가 없는 '예쁜 쓰레기'가 나오기 십상이다.
성공작과 실패작을 가르는 것은 감(感)?
2017년 설립한 보이저엑스는 이듬해부터 매년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AI 기반 영상 편집기 '브루'(2018년 출시), 모바일 스캔 앱 '브이플랫'(2019년), 손글씨 폰트 제작 서비스 '온글잎'(2020년)을 차례로 선보였다.
올해는 미용실 앱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미용실 가기 전에 현실감 나게 헤어스타일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앱이다. "미용실 프로젝트는 3년 전에도 하다가 접었어요. 그때는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이 안 됐는데 그동안 가파르게 발전하면서 지금은 가능해진 거죠"
보이저엑스가 매년 새로운 앱을 출시한 이면엔 많은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 실제 사업화를 시도한 20개 프로젝트 가운데 17개가 '실패작'이었다. 성공작과 실패작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 흥행을 판가름할 수 없잖아요. 만들어 보기 전엔 몰라요. 해보면 한 달 만에 접기도 하고 6개월, 1년 뒤에 접기도 해요. 그저 해보면서 감을 익히는 거죠.”
남 대표는 "세상에 똑 별난 성공 공식은 없다"고 강조한다. “성공할 회사를 예측할 수 있다면 모두가 주식으로 부자가 됐겠죠. 성공할 아이템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다 감으로 하는 거예요. 스티브 잡스 같이 감이 좋은 사람의 성공확률이 20%라면 보통 사람들은 5%가 안 되겠죠.”
시작 전부터 30점짜리 프로젝트
보이저엑스의 첫 서비스인 '브루'는 아이디어 단계에선 성공확률 70%, 다시 말해 70점짜리 프로젝트였다고 남 대표는 말했다. 하지만 제품 출시 이후 시장 반응을 평가해 보면 50점짜리 프로젝트였던 브이플랫이 더 잘 나간다.
마지막으로 출시한 ‘온글잎’은 시작하기 전부터 30점짜리 프로젝트였다. “성공확률 30% 정도로 사업성이 굉장히 의심스러웠어요. 자기만의 서체를 갖는다는 건 아무도 안 가본 세상이기 때문에 지금도 30점이라고 봐요.”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운영 체제(OS)와 사랑에 빠진 영화 <그녀(Her)>의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의 직업은 연애편지 대필 작가다. 그는 개인의 글씨체를 그대로 디지털 서체로 가져와 아날로그 편지를 대신 써준다.
유명인들의 서체는 시장에서 팔릴 수도 있다. 그룹 동방신기도 온글잎의 고객으로 알려졌다. 대다수 이용자는 개인 소장용이나 취미로 서체를 만들고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필체를 온글잎을 통해 살려낸 사연도 있다. 이용한 고객은 “서체가 아니라 사람이 오는 것 같았다”며 감동을 전했다. 치매 걸리시기 전 시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써주신 편지의 서체를 온글잎을 통해 만든 경우다.
AI 개발자가 AI 시대를 걱정하는 이유
브루는 자동 자막 생성 기능으로 영상 편집을 문서 편집처럼 손쉽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브루는 유튜브 영상 편집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남 대표는 작정한 듯 대답했다.
"편집자만 걱정할 게 아니에요. 5년, 10년 내 기자님 자리도 걱정해야 해요. 인간의 서비스를 대체하는 AI는 몇 년이면 나옵니다. 사람이 메타버스 공간에서 일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메타버스에서 하는 일들 대부분이 기계로 대체되는 게 핵심입니다."
여러 전문가들은 10년 내 직업의 80%가 바뀔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모든 직업은 사라지고 마지막 직업은 인공지능 개발자가 될 것"이라고 했고, 엔비디아 창업자 젠슨 황은 "소프트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남 대표는 “TV 속 AI 선생님은 학생들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을 다 해줄 수 있는 데다 실제 선생님보다 감정 케어도 더 잘할 수 있다”며 “이미 웰니스 관련 앱 서비스들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이 환영하는 게 혁신이 아니라 많이 바뀌는 게 혁신이에요. 택시 노조가 타다를 반대했던 것처럼 급격한 변화는 많은 사람이 싫어하기 마련이죠. 그런데도 혁신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변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남 대표는 "AI로 인간 수명도 늘어나고 사람을 불필요한 노동에서도 더 자유롭게 할 것"이라면서도 동시에 대다수 사람의 일이 없어질 AI 시대를 우려했다. "인간의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은 대체로 일을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일을 못 하면 본인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AI 시대에도 일이 정말 재밌는 사람은 계속 일을 하면 되고, 정말 잘 노는 사람은 계속 놀면 돼요. 하지만 혁명에 가까운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중간에 있는 많은 사람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할 거예요."참, 한 가지 더
남 대표는 일하면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회사는 직원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철학은 보이저엑스 운영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많은 이들이 회사원 대신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표준인 요즘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대기업을 다니다가 보이저엑스로 이직한 세 명의 직원들로부터 솔직한 얘기를 들어봤다. 보이저엑스 회의 시간엔 '이것에 의지 있으신 분?"이란 말을 자주 한다. 문제를 풀 의지가 있는 사람이 가장 잘한다는 강력한 컨센서스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품이 개선되는 과정을 보면, 일반 조직에서는 상반기에 개발할 기능 10개를 선정하면 담당자가 배정된다. 하지만 보이저엑스에선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용자 이야기를 듣고 자기에게 더 중요하게 들리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태스크를 찾는 식이다.
이에 대해 국내 최대 인터넷 기업 서비스 기획자 출신으로 보이저엑스에 입사한 한 직원은 "근력 운동을 좋아서 하면 퍼스널트레이닝(PT)지만 누가 시켜서 하면 기합이 된다"며 "일에서 자율이 되게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전 회사에선 나를 쪼개서 쓴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지만 보이저엑스에선 일과 라이프가 구분되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내가 존재하면서도 풍덩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워라밸’ 대신 ‘워라모니’(일과 삶의 조화)가 통하는 기업 문화라는 얘기다. 국내 디스플레이 대기업 출신 개발자 김진옥 씨는 하루 12시간 넘게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을 것만 같은 개발자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는 "서비스 앱을 개발하려면 어떤 게 정말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하루 집중해서 코딩하는 시간은 최대 4시간 정도고 주말에는 캠핑을 많이 다닌다"고 했다.
그는 스톡옵션이 일할 맛을 높여주는 요인이라고 꼽았다. "대기업에 다닐 땐 회사가 잘 되는 게 나와 무관했는데 이곳에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보다 회사가 잘되는 방향을 고민하는 게 느껴져요."
브루의 모바일용 앱을 개발을 하는 김진영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굴지의 화학기업의 화학 엔지니어였다. 그는 소프트웨어 사관학교 정글에서 5개월간 합숙 교육을 마친 뒤 지난 3월 보이저엑스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입사했다.
그는 "이미 시스템이 갖춰진 전통산업에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회사에 있다 보니 회사 밖을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유저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고 일하면서 능력치가 쌓이는 개발자의 일에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