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또다시 바다에 왔다. 바다는 내륙이 끝나는 곳에서 펼쳐진 신세계다. 여기 들이 있다면, 저기에 바다가 있다. 바다는 내륙의 외부다. 바다는 언제나 새로 시작한다. 바다는 뭇 생명의 발생 조건으로 완벽했다. 바다에서 미토콘드리아를 갖춘 단세포 유기체인 진핵생물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몇 억 년 동안 분화를 거쳐 뭇 생명들로 나타났다. 척추동물의 일부에서 진화한 인류의 조상도 바다에서 나서 내륙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보다 더 생명윤리학의 기초 교양을 기르기에 적당한 곳은 없다.

들과 바다는 그 다름이 완연하다. 들은 굳어진 땅이고, 바다의 수량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출렁이는 물로 가득 찬 곳이다. 물은 흐르고 유동하는 것의 총체인데, 바다는 온통 유동하고 출렁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바다의 시간은 그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비일상의 시간, 피안 저 너머의 시간이다. 바다는 내륙의 부동성을 밀어내며 출렁인다. 늘 같은 자리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란 이들의 인격은 구질구질하지 않다. 그것은 바다가 베푸는 부(富)와 너그러움 같은 혜택을 받은 탓이다.

내륙은 인간 군상들의 박물관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내륙의 시간과 바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내륙의 인간이다. 들의 사람으로 반평생을 사는 동안 나는 들이 생산한 것을 먹고 살을 찌우고 뼈를 키웠다. 나의 피, 생리와 기질, 나의 인격은 모두 들에게서 온 것이다. 들은 나의 가능성이자 한계다. 내 안의 내륙 기질은 바다의 부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내륙의 인간들은 땅의 배꼽에서 나온다. 땅의 향기, 땅의 기운생동, 땅의 무량함 속에서 인격의 바탕을 빚은 자는 내륙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인식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들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땅이자 동시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땅이다.

땅은 솟고 가라앉는데, 땅에서 평평한 부분인 들은 비옥하다. 강과 하천들은 휘어지고 돌아나가며 들에 물을 공급한다. 조상에게 농법을 전수받아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땅의 슬픔과 기쁨, 땅의 평등은 내륙 인간의 운명이자 이념이다. 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에 붙박이로 사는 자들의 유일한 근거다. 들 위에 마을이 서고, 먼저 씨족공동체가 번성했을 테다. 그런 마을엔 낡은 신발을 질끈 묶고 일하는 사람들, 그 밖에 금치산자, 도박꾼, 미친 사람들이 함께 산다. 어느 마을에나 금치산자, 감옥을 나온 자, 패륜아, 허풍쟁이들이 있다. 내륙은 온갖 인간 군상들의 박물관이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서정주 시집 《질마재 신화》, 1975)

땅은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가 지배한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사투르누스를 두려워한다. 내륙의 인간들에게 땅은 조상들의 묘지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지는 바다다. 조상의 뼈와 고혼을 묻은 곳. 이곳은 고토(古土)다. 이 고토 위에 세워진 게 ‘질마재’와 같은 마을들이다.

마을의 소문을 민속학적이고 인류학적으로 솜씨 좋게 복원해낸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는 ‘이것이 삶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을은 사건과 사고의 현장이다. 연애 소문이 무성하고, 인간관계의 비밀이 번성하는데, 여기에 그들의 슬픔과 해학, 음담패설과 풍속사를 뒤섞어 ‘마을의 신화’로 빚는다. 이것은 땅과 그 위에 사는 사람이 빚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진’ 이야기들의 집약이다. 이 이야기들이 설화, 민담의 시원이다.

땅의 수확물을 거두어 먹고, 자연재해를 견디며 사는 동안 내륙의 인간들에겐 땅과 맺은 관계의 양태로 각각의 인격이 부여된다. 들에서 태어난 자는 다 들의 자산이다. 그를 기른 것도 들이요, 그가 죽어 묻힐 곳도 들이다. 우리를 거두고 기른 것은 대지모신이다. 그들은 땅에서 죽는 숙명에 순응한다는 점에서 운명론자들이다. 하지만 토지는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건주의 왕조 국가와 지대(地代)에 지배당했다. 국가는 봉건적 토지 소유자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이들은 토지에 부과되는 조세와 지대를 국가에 바쳤다.

미지의 세계로 열린 탈주의 길

아시다시피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이 하품을 하면 바다에서는 태풍이 일어난다. 태풍의 중심엔 눈이 있고, 이곳은 고요하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바다는 날마다 변화무쌍하다. 격랑이 휘몰아치는가 하면 이내 잠잠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포세이돈의 기분이 시시각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바다에 오면 파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바닷가에서는 가난조차 누추하지 않다. 바다는 언제나 그 누추함을 넘치게 보상하는 까닭이다. 바다가 가르치는 것은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와 숭고함, 삶의 영예다. 바다에서 배울 진리는 단 하나, “쩨쩨하게 살지 마라!”는 것이다.

일상의 반복과 관습에 질식할 것 같은 이들은 바다로 오라! 바다에 오면 가슴이 탁 트인다. 바다는 처음의 자유다. 우리 눈길이 저 수평선에 가 닿을 때 망막을 때리는 망망대해는 인간의 불행을 축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내륙의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밤하늘의 오리온좌, 큰곰좌,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를 올려다보고 나아갈 길의 방향을 가늠하고,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친다. 내륙의 인간에게 바다는 영원한 결핍, 자유의 경험, 끝내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다. 바다는 신분의 위계와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 한마디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유가 넘치는 곳이다.

들에서 나고 자란 내륙의 인간인 나는 왜 그토록 바다를 좋아할까? 바다는 모두의 소유, 모두의 자유, 모두의 숭고를 상징한다. 3000만 년 전 영장류 가운데 일부가 처음으로 바다를 항해한 이후 바다는 줄곧 내륙에서 살 수 없는 사람에게 단 하나 열린 탈주의 길이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며 바다를 건넌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 탈주를 꿈꾸는 자들은 항상 여기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는 법이다. 바다 저 너머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바다는 미지에 대한 동경을 우리 안에 이식하며 유혹한다. 여기가 아닌 곳, 저 먼 곳으로 떠나자!